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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주차. <사마리아여행>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12. 26.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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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주차. <사마리아여행>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 12. 22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1).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2).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3),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4).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5),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6),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려 들어갔도다 하더라(7).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9).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 (19:1~10)





삭개오



성경주석가인 핸드릭슨은 지난주에 우리가 다루었던 18장의 끝부분과 오늘 본문인 19장의 처음 부분이 매우 인상 깊게 연결되어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두 사건 모두 여리고에서 일어났으며 둘째, 18장에서는 거지 소경이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추종자가 되었고 19장에서는 세리였던 한 부자가 예수의 추종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부자는 참 복이 많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알다시피 요단강을 끼고 자리한 여리고는 가나안 땅에서 상당히 비옥하고 기름진 땅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헤롯 1세는 이곳을 자신의 작은 낙원으로 꾸미기 위해 이곳에 종려나무와 장미들을 옮겨 심었다고 합니다. 이후 헤롯 대왕과 그의 아들인 아켈라오 때엔 이곳에 겨울 궁전과 극장 및 경기장 등을 짓고 휴양을 즐겼습니다. 또 로마의 3두 정치인의 한 사람이었던 안토니우스는 연인이었던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의 청을 받고 이 도시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만큼 여리고는 모든 이들이 탐내는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이런 도시에 한 사람의 부자가 호화호식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삭개오였는데 순수하다’, ‘깨끗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작카이에서 유래한 것으로 봅니다. 그는 이곳에서 로마의 세리들을 거느리는 세리장이 되어 권세와 부를 차지하고 부족함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세무서가 3개 있었는데 여리고 세무서가 그중 하나였습니다. 다른 두 곳은 가이사랴와 가버나움에 소재했다 합니다. 특히 부자들은 여리고에서 나는 발삼(Balsam)이라는 나무에서 추출한 향유를 팔아 부를 축적했다 합니다. 실제로 <고대사>의 저자인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발삼이 그곳에 있는 것들 중 가장 귀한 품목이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지리적으로도 여리고는 북으로 다메섹과 두로, 시돈과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나중에 사도 바울이 체포되어 2년간 수감되었던 가이사랴와 욥바 등의 도시와 직결되었고 남으로는 이집트로 가는 관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도시에서 비록 로마인은 아니지만 로마의 관원이 되어 부와 권세를 누린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삭개오를 유대인들이 달갑지 않은 눈초리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떵떵거리고 살아도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며 사는 인생이 좋을 리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로마의 관원들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친일파를 곱게 보지 않는 것처럼 삭개오는 백성들로부터 매국노이자 백성의 등골을 빼어먹는 착취자로 취급받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사실을 삭개오 그 자신이 모를 리 없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사람들, 특히 이웃들과 오며가며 정을 나누고 사는 재미에서 오는 것인데 제 혼자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는 것이 부질없을 일입니다. 겉으로 아닌 척해도 아마 삭개오의 마음은 늘 허전하고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이름값도 못하고 사는 인생이라 한탄했을 것입니다.



2. 예수님과 삭개오



바로 그때 삭개오는 여리고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삭개오도 사람들 인파에 휩쓸려 예수님을 보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은 삭개오는 군중 사이에서 예수님을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지나시는 길목에 서 있는 뽕나무를 택하여 그 위로 얼른 올라갔습니다(4). 이 행동 하나를 보면 삭개오의 평소 심리적 상태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무엇인가에 갈급해 있었습니다. 스스로 이렇게 사는 것이 결코 옳은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늘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로 소문이 난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자 동네로 달려 나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제 눈으로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평소 그답지 않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군중이 모인 곳에 함부로 나섰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온통 시선을 집중하느라 삭개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물론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를 제일 먼저 바라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네 집에 내가 유하여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삭개오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만남에서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하나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가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8:28)이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29)이며, “미리 정하신 자”(30), “하나님이 택하신 자”(33)로 아무도 이 사랑을 끊을 수 없으며(35), 이 사랑으로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37).

~ 다음으로 이 만남에서 삭개오의 반응입니다. 아마 삭개오는 예수님이 설마 자신을 발견하고 찾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속으로는 나도 저 많은 사람들처럼 큰 소리로 소리치며 호산나, 주 예수여 어서 오소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하고 떳떳하게 소리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국노라 취급받는 그가 어떻게 공개적으로 예수님 앞에 나서서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불시에 그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전에 삭개오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시자마자 삭개오야하고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이때 삭개오가 얼마나 놀랐을까요? 6절을 보세요. 삭개오는 예수님이 부르시자마자 급히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이것은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대개 순종하는 사람들의 행동의 특징이 이런 것입니다. 부르면 -’ 하고 바로 대답하는 사람이 순종을 잘하는 사람입니다(gg). 그 다음은 즐거워하고 영접했다고 합니다. 우리 말로는 분위기가 덜 전해집니다. 헬라어로 휘페덱사토라 햇는데 이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다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큰 기쁨으로 반기는 것을 말합니다. 삭개오가 얼마나 기뻤으면 두말하지 않고 마치 오랫동안 그리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좋아하며 예수님을 영접했을까요? , 이 삭개오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참으로 복된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3. 사람들의 반응



그러나 이 일은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소문이 자자한 그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와서 기껏 한다는 것이 천하의 매국노이자 착취자인 삭개오를 제일 먼저 찾아 그 집에 유하겠다 하니 사람들의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7)고 수군거렸습니다. 이를 영어 성경은 ‘grumble’로 번역했는데 이는 상당히 불평했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앞에서 예수님은 거지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구원을 선포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 민족의 배신자인 삭개오의 집을 찾은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속으로 예수라는 작자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군. 결국은 부자 집에 가서 잘 먹고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모양이군하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왜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이런 오해를 받으면서 굳이 이런 행동을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엔 예수님의 깊은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앞서서 예수님은 세리들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난받을 일임을 거듭거듭 설명해 오셨습니다.

1)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9:12, 2:16~17, 5:30~32)

2)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11:3)라는 질문에 대한 여러 답변들 중 하나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11:19, 7:34~35)

3)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며 예수가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비난하자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 이렇게 정리해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5:10)



예수님이 그렇게 강조하며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여전히 마음을 고쳐먹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완악함과 고집이 얼마나 굳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1)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질타했습니다.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48:4)

2)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7:24, 26)

3) 모세율법에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을 이렇게 치리하라고 훈계합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21:18~21)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 첫째, 우리가 얼마나 완고하고 패역한 족속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고집은 본성적인 것입니다. 자연인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본성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기억의 칩이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 둘째, 완고한 자는 공동체의 화합을 깨트립니다. 완고한 자는 늘 자기 존재를 부각시키고 자기 뜻대로 모든 일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의 계획과 뜻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완고한 자는 자기의 뜻과 생각이 완전한 것이라 착각하며 다른 이들의 의견이나 계획들을 무시하고 자기의 것을 내세우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이 미꾸라지 한 마리로 인해 흙탕물이 되기 일쑤입니다. 완고한 자는 평화파괴자입니다.


~ 셋째, 완고하고 패역한 존재의 말로가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패망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격리입니다. 공동체에서도 왕따가 됩니다. 이런 인생은 외롭고 처량하고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세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완고한 자라 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옳으신 분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진리의 인생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진리의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지도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행복한 인생은 없습니다. 할렐루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4. 삭개오의 변화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이렇게 완고한 자였습니다.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한 후 달라졌습니다. 그는 지난 삶을 돌이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나아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8)



이 언급에서 우리는 삭개오의 회심의 징후들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과거에 그 누구에게서 돈을 너무 많이 착복하는 죄를 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절대로 누구의 것을 빼앗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이 다짐이 삭개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불법적으로 착취한 무엇이든지 돌려주겠다고 선언합니다. 뿐만아니라 거기에 다른 것도 더하고 있습니다. 율법(6:1~5, 5:7)에는 어떤 경우든지 불의로 얻은 액수의 5분의 1을 보태 갚으라고 했습니다. 다른 경우엔 갑절의 배상을 요구하기도 합니다(22:4,7,9). 그러나 삭개오는 즉석에서 잘못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한 금액의 네 배를 돌려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자신이 가지고있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돌려준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정리하면 이제 삭개오에게 남은 재산은 거의 없게 되는 셈입니다. 1차적으로 절반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돌아갑니다. 그리고 남은 절반의 재산들은 배상액으로 사용됩니다. 만약 그의 계산이 맞다면 서너 사람에게만 배상금을 지불해도 수중에 거의 재산이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8절에서 삭개오의 자세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는 주님 앞에 서서 말합니다. 그는 전에는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할 때 그들을 세관으로 불러 세워놓고 그는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추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만군의 주님 앞에 섰습니다. 이 모습은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설 날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말을 함부로 뱉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여쭈어보는 형식으로 말을 합니다. 전에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했던 삭개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주님 제가 이렇게 말을 해도 되는지 여쭈어봅니다며 겸손으로 다가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5. 결어



이 놀라운 삭개오의 회심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



무엇보다 구원이 언급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삭개오와 예수님 모두에게 큰 기쁨을 던져줍니다. 삭개오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지만 목자이신 예수님 입장에서는 오늘도 한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찾으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목자가 찾았을 때의 기쁨을 예수님도 함께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구원이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고 이 집에 주어진 표현을 봅니다. 주님의 이 표현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에 근거를 둡니다. ,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17:7)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아브라함의 후손을 가리켜 이 집이라 한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께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한 것은 삭개오가 단순히 육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3:7)고 했습니다. 참고적으로 개혁신학에서 주장하는 유아세례의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아의 인지능력 여부를 떠나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믿고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결론이 소개됩니다. 그 말씀이 10절에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구원의 방정식을 정리해 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을 보러 나선 것은 삭개오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구원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닙니다. 그저 평소에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 했고 확인하고 싶어 몰래 뽕나무로 올라가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찾아내신 것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었던 삭개오를 찾아 구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바로 그 행동이 가장 큰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한 몸에 받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마치 동굴 속에서 햇빛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겨우 모닥불을 피워 놓고 살다가 동굴 밖으로 나아보니 진짜 햇빛을 발견하고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의 교훈은 이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 우리의 공로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구원을 위한 어떤 일말의 가능성이나 긍정적인 신호를 믿어서는 안됩니다. 아더 핑크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보지 못한 맹인이요, 완전히 기력을 상실하여 자리에 누운 중증환자였습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이 오시어 일으키신 것입니다.

둘째, 그렇다고 우리의 의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언급한 언약과 함께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의무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17:9).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은 것을 그저 누리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와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이웃에 대한 사랑과 구제와 봉사에 힘쓰며 살아야 합니다.

셋째, 무엇보다 성숙한 인격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진리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이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조국인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를 따르는 나라가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국가와 민족과 위정자들의 회개를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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