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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4장 1-11절/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박석중목사(대전)

by 김경호 진실 2020. 3. 24.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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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요나서 4:1-11

제목: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니느웨 백성들이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그들을 용서하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연히 감사해야 할 요나는 감사는커녕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어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해 주셨을 때 크게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구원해주시자 크게 분노하고 항의합니다.

 


1. 요나가 싫어하고 성냄


1절에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니느웨 성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은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고,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고, 죄인들이 회개하고 변화 받는 놀라운 일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하늘에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니느웨 성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으니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할 일입니까? 이것은 요나도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싫어하고 성을 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 나라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원수입니다. 앗수르는 자주 이스라엘로 쳐들어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또 우상숭배하고 죄짓게 하면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요나의 입장에서는 원수의 나라 백성인 니느웨 사람들이 망하는 것을 봐야 속이 후련하고 기쁘겠는데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고 구원하시니까 배가 아픈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것은 요나의 마음이 좁고 이기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2절에 보면 요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참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지, 하나님의 속성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는 분입니다.’ 요나의 이 고백대로 하나님은 정말 그런 분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자기 원수들에게까지 베풀어지는 것을 보면서 크게 화를 냅니다. 돌이켜보건대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자요, 하나님의 낯을 피하다가 물고기 뱃속에까지 들어갔던 자였습니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긍휼을 베푼 것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니느웨 백성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더 나가서 요나는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한 것을 정당화시키고 있습니다. 2절에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하나님이 니느웨 성을 멸망시킨다고 경고하셨지만 회개하면 용서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니느웨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상한 논리입니까? 전도가 성공할까봐 염려하고, 선교가 잘 되어 죄인들이 용서받을까봐 걱정했다는 말입니다. 요나는 참 이기적이고 속 좁은 사람입니다. 참 못난 선지자입니다.


더 나가서 요나는 자기 말대로 되지 않아서 자기 체면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 일이 잘되는 것보다 자기 체면을 세우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자존심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죄인이라도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라도 회개시켜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루가 천년 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큰 죄를 지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인이라도 회개 시키려고 요나를 보내고 회개하니까 용서해주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이 마음을 몰랐습니다. 요나는 열심은 있으나 사랑이 없었습니다. 수고는 많이 했으나 기쁨이 없습니다. 요나는 율법은 알고 있으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도 고민에 빠졌습니다. 기뻐해야 할 일에 슬퍼하고 있습니다. 감사해야 할 일을 가지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셋째, 요나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3절에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는 축제를 벌려야 될 시간에 죽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되었다고 죽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해서는 안됩니다.


넷째, 요나는 다시 주저앉아 있습니다. 5절에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중요한 단어는 앉아라는 말입니다. 1장에서는 도망치는 요나를 봅니다. 2장에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요나를 봅니다. 3장에서는 열심히 전도하는 요나의 모습을 봅니다. 4장에서는 다시 주저앉아 불평하는 요나를 봅니다. 요나가 주저앉아 있는 것은 할 일이 다 끝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직도 할 일은 많이 남아 있으나 그는 주저앉아서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되는가 구경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요나처럼 일하다가 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앉아서 교회가 어떻게 되는가 구경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하는가, 못하는가? 구경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일하는 사람입니까? 구경하는 사람입니까? 구경하는 자리에 있으면 다른 사람의 허물만 보입니다. 열심히 일할 때는 보이지 않던 허물이 잘 보입니다. 누구도 틀렸고, 누구도 틀렸고, 온통 허물과 실수, 잘못하는 것만 보면서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경꾼으로 앉아있으면 시험에 들 일이 더 많습니다.

 


2.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첫째, 4절과 9절에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드러운 말씀으로 요나를 깨우치십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에 대해서도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지만, 불평하는 요나에 대해서도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하게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것은 전혀 잘못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가 나타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자기 생각대로 안 되었다고 하나님께 분노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판단하면서 하나님보고 틀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여러분 혹 분노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합당한 것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요나의 경우처럼 자기 이기심에서 나온 분노는 아닙니까? 내 뜻대로 안되니까 화내는 것은 아닙니까? 혹 자기가 잘못하고 하나님을 탓하는 것은 아닙니까? 가인의 분노를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제사를 잘못 드리고 아무 잘못도 없는 아벨에게 화를 내고 분풀이를 합니다. 가룟유다의 분노를 보십시오.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자 그것을 보며 분노합니다. 마리아가 선한 일을 했는데 왜 분노합니까? 잠언 19:3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둘째,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셨습니다. 박넝쿨은 잎이 크고 빨리 자라는 식물입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역사하셔서 더 빨리 자라게 하셔서 그 박넝쿨로 그늘을 만들고 더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요나를 서늘하게 해주셨고, 그로 인해 요나는 심히 기뻐합니다. 7절에 보면 이튿날 하나님께서 벌레를 예비하셔서 요나가 앉아 있는 그 박넝쿨에 기어오르게 하시고 그 넝쿨을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8절 보면 하나님께서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를 요나의 머리에 내리쬐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했습니다. 여기에 예비라는 말이 나옵니다. 박넝쿨도, 벌레도, 뜨거운 동풍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이용하셔서 요나를 깨우치고 교훈하십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을 통해서 인간에게 징계도 하시고 축복도 내리십니다.


요나가 기뻐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박넝쿨입니다. 요나가 불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박넝쿨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 박넝쿨은 요나가 심은 것도 아니고 요나가 키운 것도 아닙니다. 저절로 났다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박넝쿨 하나 때문에 죽겠다고 하고, 못살겠다고 죽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수십 만 명이나 되는 니느웨 백성들은 멸망하기를 바라면서, 자기에게 유익을 준다고 해서 초라한 박넝쿨의 죽음을 슬퍼하는 요나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이기적이고 부패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무엇 때문에 슬퍼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10절에 보면 하나님은 박넝쿨과 니느웨에 있는 12만 명을 비교하면서 물으십니다.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느냐, 어느 것이 더 귀하냐요나는 니느웨 백성보다 박넝쿨을 더 아꼈습니다. 자기 것도 아닌 박넝쿨,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없어자는 박넝쿨을 지극히 아꼈습니다. 요나의 관심은 박넝쿨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관심도 박넝쿨에만 있는 것 아닙니까? 내 재산, 내 건강,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내 집, 내 자동차, 내 직장, 내 사업 등등.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박넝쿨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박넝쿨 하나에 인생을 걸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정말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더 아끼고 무엇을 더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이 분노하고, 속상해하고, 잠 못 자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예배를 빠지고도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매상이 좀 떨어지면 잠을 못잡니다. 믿음이 떨어질 때는 전혀 속상하지 않으면서 자녀의 성적이 좀 떨어지면 난리를 치지는 않습니까? 안 믿는 자들의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은 전혀 없고 물질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아끼실까요?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입니다. 영혼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비록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고, 허물이 많은 죄인들이지만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아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아끼시지만 우리 이웃들도 아끼십니다.

11절에 보면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나서는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이 납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이 질문에는 아무런 답변이 없습니다. 이 질문에 모든 성도들이 스스로 답변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요나가 싫어하는 그 니느웨 사람을 하나님은 아끼십니다. 혹 여러분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미워하다가 원수가 된 사람은 없습니까? 혹 마음속으로 저 사람은 벌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하나님은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들이 비록 큰 죄를 짓고, 악한 짓을 했을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아낀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도 내가 아낀다.”




대전 탄방교회 박석중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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