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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주차. <부할절특별메시지> 부활하라! 2020. 4. 12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0. 7. 7.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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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주차. <부할절특별메시지> 부활하라! 2020. 4.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였으리ㅏ.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2~19)

 

 

부활이란?

 

부활이란, 한 마디로 죽은 자가 새 생명을 얻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특히 역사의 종말에 전 역사에 걸쳐 살았던 의로운 자들이 부활한다고 명백하게 선포합니다. 이러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은 히브리어 달리다굼과 헬라어 아나스타시스라는 단어를 택하여 부활을 설명하였는데 둘 다 일어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일어난다는 것은 다시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부활의 의미를 좀 더 확대해 보면 우리 삶의 전반에 부활이 적용됩니다. 오늘은 이 부활의 의미와 참된 정신이 어떻게 우리 인생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짐과 동시에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몇 가지 부활에 관한 신학적 분석도 함께 해 보겠습니다.

 

2. 부활 계시

 

알다시피 계시란,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어떤 사실을 알리신 것을 두고 일컫는 말입니다. 계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포칼립시스인데 이는 물건으로 치면 덮개나 뚜껑에 가려져 있던 것을 들추거나 벗겨내어 속의 내용을 보인다는 의미이며, 어떤 개념이나 속성의 입장에서 보면 숨겨진 사실들이나 비밀한 내용들, 또 인간의 능력으로는 풀 수 없는 신비한 내용들을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거나 가르쳐 주신 것을 통칭합니다.

 

하나님의 계시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계시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상 구약 성경은 약속하신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구원자로서의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 구약 성경의 핵심적인 계시였습니다.

 

그 계시에 따라 이 당에 오신 예수님은 영원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 간에 체결하신 구속협약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분은 일평생 고난과 수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34~5년간의 짧은 인생을 사시면서 온갖 수모와 희롱과 모멸과 굴욕을 겪으시면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주셨습니다. 천국에서 오신 분이시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천국 이야기를 들려주셨음에도 사람들은 주님이 들려주신 천국 이야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님은 사람들의 모함을 받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더욱 놀라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 죽음이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의 계시로 선지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일생은 죽으면 끝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죽음 뒤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죽음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모든 인류 중에 오직 예수님만이 죽은 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인물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이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으며 무려 40일 동안이나 제자들과 함게 계시다가 자신이 내려오신 원래의 고향인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요,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는 신앙의 핵심이며, 모든 그리스도인 절대적으로 소망하는 희망이요 소원이며 반드시 성취되어질 것이라는 많은 계시의 증거들과 함께 절대불변의 진리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부활에 대한 어떤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졌는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첫째, 부활은 만물에 이미 계시되었습니다.

~ 하나님은 인간들이 부활을 불신하지 못하도록 만물의 소생으로 부활을 예표해 두셨습니다. 겨울에 죽었던 나뭇가지에 새봄의 기운이 스며들면 새싹이 돋고 꽃이 핍니다. 이 광경을 보고서도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부활은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변화하듯이 다른 차원으로의 변화를 말합니다. 만물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자연의 증거입니다.

 

둘째,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이미 예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성경대로(15:3~4)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53:8)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22:15)

 

예순 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9:26)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16:10)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6:2)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52:13)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37:5, 10)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나타나시었습니다. 먼저 게바에게 보이신 후(24:24), 열두 제자에게(20:19, 26), 갈릴리 500여 형제에게(28:16), 주의 형제인 야고보에게, 모든 사도들에게, 바울에게(9:3-6) 직접 보이셨습니다.

~ 당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과 기록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심지어 아시아의 총독이었던 플레비우스마저 자신의 친구이자 로마 황제인 하드리안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3. 반 부활 사상들

 

독일어는 역사를 두 개의 단어로 표기하는데,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히스토리에(Historie)라고 하고 그것에 대한 실존적인 이해와 해석을 담아 재구성한 것을 게쉬히테(Geschichite)라고 합니다. 예수라는 인물이 존재했고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사신 인정과 해석은 다릅니다. 유서 깊은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친히 인간이 되셨고, 대속 제물이 되셨으며, 그 사건이 인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근거라고 믿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모반죄나 모독죄로 처형당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인류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속죄 사역이었다고 믿습니다.

 

19세기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은 유서 깊은 기독교가 믿어 온 예수와 2천 년 전에 실제로 존재했던 예수가 같지 않다고 봅니다. 신약성경이 역사적 사실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종교심으로 가득 찬 광신자들의 고백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이들에 따르면 고백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일종의 과찬이라는 것입니다. ,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예쁘게 보이지 않는 여인이라도 그를 사랑하는 남자의 눈에는 예쁘게 보이고 그래서 당신은 참으로 예쁘다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약성경은 그 시대에 그리스도를 따르던 자들의 고백과 무의식적인 거짓말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한편으로 이들은 예수는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바 없는 데, 초대 기독교인들이 그를 지나치게 존경하여 신화화했고, 종교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포장했다고 봅니다. 예수가 하나님이며 그리스도라고 하는 신앙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만들어 낸 상품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주장과 더불어 나타난 것이 역사적 예수입니다. 이 예수가 고백과 허상 이야기를 제거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복귀한 실제 예수라고 말합니다. 이 예수를 두고 도올은 인간 예수; 혹은 원조 예수라 부릅니다.

 

한편, 20세기에 들어서서 자유주의자들은 관념론적이고 실존주의적인 태도로 돌아섰습니다. 진보주의 신학자들은 부활 사건에 대한 게쉬히테의 의미에 집착하고 히스토리에의 의미에 관심이 없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케리그마’(설교)를 통해 선포되었기 때문이지 합리적 이성으로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이 검증할 수 없는 과거의 사건에서 자신들의 신앙의 실존적인 의미를 찾는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일부 보수주의계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히스토리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역사적 사건의 게쉬히테의 성격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부활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믿으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이 되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회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역사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인식 과정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다고 하는 역사지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알려졌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부활, 승천이 역사적으로 일어난 실제 사건이 아니라면 그것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종교지식이나 교리를 신앙하는 것은 맹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편, 절대 객관주의 관점으로 역사에 접근하면 역사지식에 동원되는 주관적 이해와 재 구성적 측면을 간과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 가운데 많은 부분을 전해 준 누가복음의 저자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서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1:1~4)

 

이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성경에 기술된 역사사건을 이해라는 과정을 거쳐 재구성했음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간섭 아래서, 유기적인 감화와 감동으로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역사가 이해라는 과정을 거친다는 말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와 재구성에 미친 관점, 세계관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활동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제한성을 뛰어넘는 특별계시라는 방법으로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지 않게 우리에게 알려지도록 했습니다.

 

성령은 역사가 안에서 역동적으로 유기적으로 역사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성령의 지도 아래서 자신들이 인식한 역사지식을 정직하게 전했고, 서술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역사지식에 오류가 없도록 간섭했습니다. 성령의 초월적이고 내재적인 활동은 성경 기록자들로 하여금 일어난 사건을 사실 그대로 기술하고 그것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서술하게 했다. 성경은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초월적 활동의 감동으로 기록된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정리하자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가,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토대인가 하는 것은 상식 객관주의(Common Sense Objectivism)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활동 아래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었을 뿐 아니라 그의 죽음이 인류를 위한 대속적인 사역이라고 서술합니다. 예수는 부활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모든 잠자는 사람들의 첫 열매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부활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직한 증언자들의 증언과 하나님의 영감을 받는 저자들의 노력의 결과입니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그것에 대한 해석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역사의 진실성은 특별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의 진정성에 버금갑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은 초자연적인 계시의 성격을 지녔으면서도 보편적인 역사의 범주에 속합니다. 그것들은 상식적인 의미의 객관적 사실입니다. 성령님은 성경 기록자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역사를 정직하게 사실대로 기록하도록 했습니다. 역사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신화, 과장된 고백, 고상한 거짓말이 아니라 목격자들의 정직한 증언을 담도록 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이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사실(fact)이지 허구(fiction)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정말로 이 땅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부활합니다.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고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 복락을 주릴 것입니다.

 

4. 부활의 의미

 

, 이제 이 부활이 나에게서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느냐에 대해 강설코자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다섯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보고 이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부활은 거듭남입니다.

~ 기독교는 거듭남의 종교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영혼이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는 일에 바빠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등한시합니다. 영혼의 문제는 당장 시급한 일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는 죄로 인해 모든 영혼이 지옥형벌을 받는다는 것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그 어떤 인생도 중요치 않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밤에 몰래 찾아온 당대 최고 학자 중 한 사람인 니고데모를 향해 거듭나지 않고선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가장 긴박하고 중차대한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 진짜 두려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현대인들은 지옥 이야기를 하면 속으로 대개 코웃음을 칩니다. 이 대명천지에, 이 과학 문명이 최고조로 발달한 시대를 사는 자기에게 감히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하느냐고 힐난합니다. 어떤 이는 지옥 이야기를 하면 자기 인격을 모독하지 말라고 소리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의 결정적인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경 한 줄만 읽어보아도 인간의 죄가 얼마나 위중하고 악질적인 것인가를 알 수 있음에도 아예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미안하지만 천국과 지옥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들이 믿든 믿지 않든 공기 중에 산소가 존재하듯이 하나님의 나라인 영원한 천국이 우리를 존재하고 구원 받은 백성들을 그 나라로 부르십니다. 그렇다고 이 나라에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천국면허장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을 신학 용어로 중생이라 합니다. 중생은 죄인의 신분을 버리고 의인의 신분으로 옷을 갈아입는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거룩한 나라이기에 이 나라에는 조금도 더럽고 추하고 악한 죄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조인은 도저히 꿈도 꾸지 못하는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 믿는 자에게 거듭남의 은혜를 베푸시어 죽었던 죄인의 영혼을 살리시고 천국에 들어가는 허가장을 발급해 주신 것입니다. 이 거듭남이야말로 진정한 부활입니다.

 

둘째, 부활은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입니다.

~ 인생에는 육적인 일과 영적인 일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즉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은 눈에 보이는 육적인 일에 골몰합니다. 그들은 육안으로 관찰 가능한 일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계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세계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과 지혜로 아는 세계가 아니라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일들입니다.

~ 성경은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을 일러 어둠 안에 갇힌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이들에겐 믿음이라는 도구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진짜 빛의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이 빛의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이고, 하나님의 세계는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말씀이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에 있다는 것은 아직 진리에 눈을 뜨지 못하였다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무엇이냐 하면 드디어 진리의 세계, 영적인 세계에 눈을 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이냐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이때 믿음의 눈을 가지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입니다.

 

셋째, 부활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의 대변혁입니다.

~ 기독교는 철저히 이타주의를 지향합니다. ‘라는 존재는 우리를 위해 존재합니다. 주님은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기주의에서 이타주의로 거듭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중심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종은 주인의 말대로 행해야 합니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와 너가 공존하고 상생하는 사랑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에는 두 가지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우리 가운데 우리의 원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는 사탄의 무리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이것은 영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육적으로는 모두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누가 원수인지 분간하기 힘듭니다. 주님의 가르침의 요점은 우리 능력을 벗어나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원수를 가리고 처벌하는 일은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진정 나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를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그는 실제로 부활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넷째, 부활은 나쁜 습관에서의 탈출입니다.

~ 왜 인간이 태어나면서 죄인이냐 하면 좋은 습관을 하나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배가 고프면 웃으면서 밥을 달라 하지 않고 응애- 하고 웁니다. 누가 가르치고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모든 인간은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하고, 변명하고, 고자질하고, 내 것을 빼앗아 가는 일에 대항하고, 나보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추켜세우면 마음이 시기 질투로 배배 꼬이고, 미움이 생기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형제자매끼리도 다투고 싸우고 주먹질합니다. 뿐만 아니라 얼마나 놀기만 하고 공부하기 싫어하고 일하기 싫어하고 탐욕적입니까? 게으르고 불성실하고 잘난체 하고 우쭐대고 다른 사람 험담하고 약자를 괴롭히고 훔치고 덮어씌우고 함정에 빠트려 멸망케 합니까?

~ 정말로 진정한 부활은 거룩한 습관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늘 강조하는 바이지만 인생의 승패는 거룩한 습관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섯째, 부활은 사망에서 영생으로의 진입입니다.

~ 그러나 무엇보다 부활은 개인적이고 현세적인 의미가 아니라 종말론적인 의미에 집중됩니다. 우리의 부활은 영생을 위한 것입니다. 이 영생을 위해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내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65:17~19)

생각해 보세요. 우리를 위해 하늘과 땅을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이곳에서는 죽음이 없습니다. 고통과 슬픔도 없습니다. 오직 기쁨과 즐거움만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부활이 주는 마지막이자 최고 최대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가슴에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부활 신앙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매일 새로운 부활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작은 부활들이 모이고 모여 드디어 최종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고통에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하늘 아래에 살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밥을 먹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들과 달리 부활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몸은 저들과 같지만 영혼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세례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속한 영혼을 가졌습니다. 이 영혼은 거듭남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가졌습니다. 이 생명은 코로나가 위협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몸이 아프게 된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역사요 섭리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누구보다 청결에 힘쓰고 정부의 방침에 순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때일수록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착념해 주시길 권면합니다. ‘오직 말씀과 더욱 사랑이라는 교회의 모토를 기억하고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부활절을 다시 한번 놀라운 감격으로 기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아멘.

 

[출처] 15주차. <부할절특별메시지> 부활하라! 2020. 4. 12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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