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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주차. <구원론 강설> 구원의 네 가지 질문과 서정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0. 7. 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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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주차. <구원론 강설> 구원의 네 가지 질문과 서정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7~19)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내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게 눈 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42:6~7)

 

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49:1)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잇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51:2)

 

 

1. 성경과 설교의 목적

 

성경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구원을 가장 정확히 설명한 신학을 일러 칼빈주의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칼빈주의의 구원론을 가장 반대하는 세력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1626년부터 독립적으로 네덜란드 자유교회를 세우고 칼빈주의 계열과 분리되어 오늘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후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뉴잉글랜드 교회에 큰 영향을 주어서 훗날 침례교회와 존 웨슬리의 신학을 출발점으로 둔 감리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특별히 존 웨슬리는 어릴 때부터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신봉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기에 당연히 칼빈주의에 대한 반감이 컸습니다. 웨슬리는 매우 냉혹하게 칼빈주의를 반대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칼빈주의의 예정론 교리가 사탄이 최근 50년간 만든 교리 중 가장 사악한 교리 중 하나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동조하고 추종하는 세력들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의 제임스 패커 교수는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아직도 거론되는 이유는 세상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구원론에 있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어느 한 군데 속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Arminianisms, 1985).

 

어쨌든 우리 선조들은 1619년에 도르트총회를 열고 일명 튤립’(TULIP)이라는 칼빈주의 5대교리를 만들어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비성경적 주장임을 공고히 했습니다.(그렉 포스트라는 신학자는 튤립 대신에 웁시’(WUPSI)라는 용어가 더 적당하다고 합니다). 이후 시대마다 훌륭한 칼빈주의자들은 5대 교리를 바탕으로 한 구원론을 열심히 설교하고 가르쳤습니다. 설교의 황태자였던 찰스 스펄전 목사는 이 교리를 설교하지 않는 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대한 제대로 된 설교는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칼빈주의는 복음의 별칭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외 찰스 핫지, 조지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드, 존 번연, 존 폭스 등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을만큼 수많은 칼빈주의자들이 5대 교리를 정호가히 당당하게 설교했습니다. 그중 가장 가까운 시기에 사셨던 성경강해자인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칼빈주의자였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10장을 강해하면서 칼빈주의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 준 교리이며 그것을 바울이 성경에 다시금 체계화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교리 내용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내용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오늘도 우리는 성경적 구원론을 설교하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과 설교의 목적은 오직 구원에 있음을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어떤 설교이든 하나님의 구원을 외쳐야 합니다. 그것도 어설픈 구원이 아닌 하나님의 확실한 주권적 구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의해 주어진 은혜의 선물임을 분명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5~17)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두 가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를 구원에 이르는 방법을 깨닫게 하시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십니다. 이것을 두 단어로 축약하면 앞의 것은 이고 뒤의 것은 성화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설교자의 설교의 내용을 요약하면 바로 구원과 성화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이 기록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목적은 문학과 철학을 위한 것도 아니며, 과학과 처세술과 각양 인문학적 목적을 이루기 위함도 아닙니다. 성경은 오로지 지옥에 가야 할 인생의 구원하고 구원 받은 인생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2. 구원론의 네 가지 주제

 

이제 우리는 설교의 목적이 하나님의 구원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설교자들이 올바른 성경적 구원론을 설교해야 함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구원론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 대체 어떤 구원론이 성경적 구원론인가 하는 것입니다.

 

프리스턴의 벤자민 워필드(1851~1921)<구원의 계획>이라는 명저를 통해 다양한 구원론을 소개하면서 성경적 구원론이란 오로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을 통한 구원, 즉 칼빈주의 구원론임을 확고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 워필드는 구원론에 대한 네 가지 문답을 작성하고 당신이 어떤 구원론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도록 하였습니다.

 

하나. 구원은 인간 스스로 이루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인가?

. 하나님의 구원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어떤 예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

. 구원의 은혜는 모든 사람이 받는가, 아니면 특정한 사람들이 받는 것인가?

.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결단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예정인가?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해 앞의 것을 답하면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이고 뒤의 것을 답하면 칼빈주의자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구원이란, 하나님이 전적인 주권을 가지시고, 하나님이 기쁘게 생각하시는 의지대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특별히 제한된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다시 말해, 첫째,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조직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는 이 은혜를 100% 은혜라는 차원에서 하나님 중심 구원론’(God-centered salvation)이라 명명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 혹은 무엇을 통해서 임하는 것이 아니고 직접 임하는 것입니다. 셋째, 직접 임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며, 넷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자력에 의한 결단이 아니라 그렇게 결단하도록 이끄신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결과이지 성취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얼마나 많은 비성경적 구원론이 난무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인본주의자들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만의 일이라는 것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에 이런 교리는 매우 불공평한 것이라 공박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유기하는 그런 잔혹하고 매정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우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역사를 끝내 부정하고 무시하고 어떻게 해서든 구원의 일에 인간의 행위가 개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구원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에 불과할 것이라 말합니다. 이에 대해 유명한 설교가였던 아더 핑크(1886~1952)”20세기 하나님은 너무나 연약해서 인간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해 인간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고 있다고 비꼬면서 인간의 반응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면 하나님은 무능한 하나님이며 창조주에게 주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 주권을 행사하는 꼴이 된다고 설파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많은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입으로는 구원에 있어서 100%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고백하면서도 실제 생활에 있어서 구원을 위해 인간의 역할을 설정하고 하나님의 일을 도와야 된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신인협동론적 구원론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렇게 포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공짜로 주셨다. 그러나 그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완전한 구원의 은혜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결단하여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구원의 효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변질된 구원론을 정리하면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 믿음은 우리의 결단이라는 헛된 구호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유명한 칼빈주의자인 헨리 미터는 이런 인본주의적 생각에 대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실행이 인간에게 달렸다면, 즉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절하느냐에 달렸다면 그 구원은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으므로 이것은 철저히 비성경적이다고 명확하게 정리했습니다(미시간주 그랜드레피즈에 헨리미터센터가 있는데 칼빈에 대한 가장 많은 자료를 보유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우리의 구원이 인간의 의지와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스며든 불순물입니다. 100% 오렌지 주스에 다른 첨가물이 들어가면 그것이 100% 오렌지 주스가 아닙니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은혜를 입으로 말하면서 몸은 구원을 얻으려고 선행하고 공로를 쌓으러 하신다면 지금 당장 그런 행동들을 중단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 철저히 무능력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완전히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무슨 능력이 있어 반응하고 보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살리시고 다시 일으켜 세울 때까지 죄인이 할 수 잇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에베소서 28~10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몇 가지 원칙을 반포하셨습니다.

은혜에 의해“(by grace)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in JX)

선한 일을 행하게 하게 위하여”(to do good work)

하나님이 예정하심”(God predestined)

 

3. 구원의 서정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알고 더욱 확실하게 구원론의 교리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구원이 이론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순서로 주어지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물론 구원은 즉시로, 단번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론적으로 구원에도 순서를 정하여 가르칩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구원의 서정 혹은 여정이라 합니다.

 

먼저, 구원의 서정을 논할 때 가장 기초가 되는 성경 구절은 롬 8:30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

 

여기서 일단 구원의 주춧돌(모퉁잇돌)과 세 기둥이 세워집니다. 구원의 주춧돌은 먼저 미리 정하심, 즉 작정 혹은 예정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영원 전에 다 작정하시고 예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구원의 일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자 구원의 모퉁잇돌이 됩니다. 이 모퉁잇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구원의 집을 짓습니다. 우리는 이미 14주차 설교를 통해 구원의 주춧돌인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논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구원의 기둥은 이 주춧돌 위에 세워집니다.

 

, 이제 이 주춧돌 위에 하나씩 기둥을 세워보기로 하는데 우선 세 개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기둥은 부르심 즉 소명이고, 다음 기둥이 의롭다 하심 즉 칭의이며, 세 번째 기둥이 영화롭게 하심 즉, 영화입니다.

 

이제 이 세 기둥을 세운 다음에 차례로 중간에 다른 기둥들을 세우면 됩니다. 하나씩 세워봅니다. 먼저 소명과 칭의 사이에 기둥을 세웁니다.

 

1) 먼저 신앙, 즉 믿음은 칭의에 앞섭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니 차별이 없느니라"(3:22)

 

2) 중생은 신앙에 앞섭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 이는 죄의 지배적 세력으로부터 해방됨이요,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일 5:16)

 

이에 따라 소명-중생-신앙-칭의의 기둥이 세워졌습니다. 여기서 신앙은 회개 혹은 회심과 쌍둥이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은 회심 뒤에 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회심은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본인의 의지의 결단입니다. 이 결단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물론 이 의지적 결단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앞에 회심의 기둥을 끼우면 다섯 개의 기둥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제 칭의와 영화 사이에 기둥을 세웁니다. 먼저, 신앙은 양자에 앞섭니다.

 

"그를 영접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1:12)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 또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1:13)

-> 듣고 믿는 것(신앙)이 먼저요, 성령의 인치심, 즉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됨을 확정하는 것이 그 다음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양자는 분명히 칭의 다음(의롭다 하신 자를 아들 삼음)입니다. 다음으로 성화는 중생에서 시작된 진행 중인 과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성령님의 현재적 사역으로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적용되고 성취되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은혜는 한 사람의 구원받은 백성을 끝까지 지키고 보존하여 영생으로 이끄시는데 이것을 견인이라 부릅니다. 이 견인에 의해 성도는 구원의 효력을 잃지 않고 마침내 영화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줄로 그어 펼치면 이렇게 됩니다.

 

<작정(예정)-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

 

한편, 이 구원의 서정을 시간적으로 배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구속질서의 시간적 개념이라 말합니다.

1) 과거적 개념 : 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양자

2) 현재적 개념 : 성화-견인

3) 미래적 개념 : 영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작정(Decree)하심으로 구속자를 선택(selection)하시고, 때가 이르러 불러 주십니다(소명, calling)

 

둘재, 소명을 받은 자는 다시 태어나(중생, rebirth)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회심, a change of heart / conversion), 값없이 주시는 믿음(신앙, faith)으로 회개(repentance)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회개한 자를 용서하시고, 그의 죄를 간과하시고 도말하시고, 죄 없다 하시고 그를 의롭다 하시어(칭의, justfication),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하십니다(양자, adoption).

 

넷째, 하나님의 자녀(백성)는 이제 성령에 의해 성화(sanctification)의 길로 견인(堅引)되어(perseverance) 마지막으로 영화롭게 됩니다(glorification).

 

4. 결어

 

좀 복잡한 이론들을 소개함으로 성도들의 머리가 조금 어지럽지는 않는지 염려가 됩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교리적 기초를 세우지 않으시면 언제든지 아르미니우스주의로 기울어진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문제는 오늘 배운 성경적 구원론이 실제 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신봉하는 교회들은 지금도 많은 교인을 얻고자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교회로 데리고 오고자 애를 씁니다. 그것을 전도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교회로 끌고 오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관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자상하게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그가 성령의 이끌림에 따라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주된 전도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매우 긴 시간과 성실한 노력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전도는 결코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그냥 교회당으로 데리고 오기만 하면 되는 일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 손에 복음이 들여 있습니다. 이 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 이 고귀한 선물을 함부로 낭비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정말 헛된 인생을 사는 것일 것입니다. 이 귀한 복음의 선물을 누구에게 주어야 합니까? 당신은 정말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복음을 아낌없이 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구원의 서정에 따라 한 주씩 혹은 두 세주 씩 나누어 설교하겠습니다. 다음 주엔 소명(부르심)에 대해 설교하겠습니다. 기도하시고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출처] 16주차. <구원론 강설> 구원의 네 가지 질문과 서정 2020. 4. 19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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