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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주차. <구원론강설> 하나님이 부르시다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0. 7. 16.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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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주차. <구원론강설> 하나님이 부르시다 2020. 4. 26.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11:29)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2:2)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1:13)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3:4)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6:8)

 

 

 

1. 구원의 서정에 대한 소회

 

 

금주부터 지난주에 배웠던 소위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 구원의 순서에 대해 하나씩 알아봅니다. 물론 이러한 순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에서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보다는 구원의 모든 축복이 주어지는 기초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였습니다. 화란의 개혁신학자인 벌카우어 같은 이는 성경에는 구원의 서정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명확하게 구별되는 구원의 단계들로서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반대합니다. 예를 들어 믿음 같은 요소는 어느 한 지점에서 다룰 것이 아니라 칭의, 성화, 견인 등과 같은 모든 신자의 삶의 과정 전반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초점은 무엇인가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개개인들의 경험 속에서 어떠한 순서로 파악되느냐 보다 그러한 요소들로 구성된 구원의 풍요로움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구원의 모든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로 연합된 것을 오히려 갈라놓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에 대한 학습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기초적인 지식을 배양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효력을 발휘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서너 달, 혹은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 풍요로운 구원의 전 과정을 학습하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면서 이 모든 일에 성령님의 개입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함께 하실 것을 바라고 믿는 바입니다.

 

 

2. 부르심

 

 

오늘은 제일 먼저 등장하는 부르심을 학습합니다. 부르심을 신학 용어로는 소명이라 하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뜻입니다. 영어로는 Calling이고 헬라어로는 크레시스입니다. 이 단어는 동사 칼레오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무엇무엇을 밖으로 불러내다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면 어둠의 세상에서 빛의 세상으로 불러내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은 아무튼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인정하든 아니하든 좋지 않은 상태에 처한 나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어 좋은 상태로 바꾸어 놓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부르심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갑자기 내게 다가와서 당신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겠다고 하면 쉽게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믿음으로 고백하고 선포합니다. ,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동의어입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1:6)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굣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2~3)

 

 

교회 앞에 살면서, 매일 교인들을 만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고향에서 아버지가 가업으로 물려준 음식점을 경영하면서 별 탈 없이 살아오면서 어느새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그는 교회 덕분에 먹고 사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손님이 교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코앞에 있는 교회당 건물 안으로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교인들과 친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매우 유쾌하고 친절합니다. 교회가 하는 행사에 찬조금도 아끼지 않고 내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의 찬조에는 다분히 음식점을 경영하기 위한 사업 목적이 깔려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과 교회는 상부상조하는 관계입니다. 서로 좋은 말로 인사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이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 믿으라는 말에는 한사코 손사래를 칩니다. 그런 말만 아니면 다 좋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음식점을 운영하는 것도 벅차 교회에 다닐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그는 교회 앞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의 아내는 다릅니다. 갑자기 아내가 교회에 나가겠다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이 여자가 머리가 돌았나?”하고 생뚱맞은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남편 말에 싹싹하게 순종하던 아내가 달라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네 알았어요하고 물러날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내 뜻대로 할거예요라고 항거를 하였습니다. 남편은 속으로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고 주일날 아침에 교회로 나서는 아내의 등짝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는 겁니다. 교회 가는 것을 막자니 이혼당하는 것이 두렵고, 그렇다고 방치하자니 일요일 식당 장사가 걱정입니다.

 

 

이렇게 지금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회심을 하고 교회에 나오는 광경을 지금도 우리는 목격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때가 이르자 예정 가운데 선택해 두었던 그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 나라는 지금까지 몸담고 있었던 세상 나라와는 판이하게 다른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인간의 능력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나라도 아니고 높은 지위를 이용해 빽을 써서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며 우연히 소 뒷걸음치다 요행이나 행운으로 들어가는 나라도 아니고 기발한 재주나 기술을 발휘하여 들어가는 나라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이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이기에 주님등록증을 발급해서 국민의 신분을 보장한다거나 여권이나 비자 같은 입국허가증을 발급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실제로 존재하며 영원히 존재합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오직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도 스스로 노력해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믿어지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성령의 역사가 순서상 가장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3. 다양한 부르심

 

 

그렇다고 당신만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선택하여 하나씩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한 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을 모델로 삼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어떤 백성인가를 우리에게 미리 가르쳐주셨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26:12)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선언이자 개인적으로는 초청장을 발급하는 일과 같다 하겠습니다. 이어 믿음을 선물하고 천국행 열차에 올라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방식과 모양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고(12:1~2), 모세처럼 한 민족의 최고 지도자로 부르시고(3:4), 다윗 같은 이는 왕으로 부르시고(삼상 15:17), 브살렐 같은 이는 장인 즉 전문기술자로 부르시고(31;1~6), 어떤 이는 사사로, 선지자로, 성전을 섬기는 레위인으로, 사도로, 교사로, 장로로, 집사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부르심이 가리키는 하나의 목표지점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이렇게 영원 전에 비밀리에 택하여 두신 당신의 자녀들을 때에 맞추어 부르시어 위대한 구원 사역에 동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과 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권리이자 의무라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영원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라는 한 개체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받은 이후부터 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위치에서 충실한 삶을 살면서 이웃과 더불어 하나님이 바라시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힘을 합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지상에 다양한 교회들을 세우시고 이들을 통해 한 걸음씩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계십니다.

 

 

4. 부르심에 대한 두 가지 반응

 

 

그런데 앞의 음식점 사장님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다 듣고 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의 귀에 들리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모든 사람의 귀에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외적 소명’(external calling)이라 하고, 외적 소명을 받은 사람 중에서 특별히 믿음으로 반응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내적 소명’(internal calling)이라 부릅니다.

 

외적 소명은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차별 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나는 복음을 듣지 못했어요라고 변명하는 것을 미리 차단하는 효과를 거둡니다. 복음은 시간과 민족과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자에게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2:32)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55:1)

 

 

아마 한국인치고 교회의 십자가를 보지 못했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복음에 있어서 변명치 못합니다. 자신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외적 소명에 관심을 가지고 한 번이라고 교회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혹자는 그렇다면 복음이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훌륭한 분들은 아예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이것은 너무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 하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다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한 판단입니다. 누구를 구원시키거나 시키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결정하시고 선택하시고 부르시어 구원을 시키는 권한을 가지셨습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리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이자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열 명의 사형수를 다 사면시킬 수도 있으시고, 그중 단 한 명만 사면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결정은 가장 완전한 결정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판단이시며 가장 인간에게 유익한 선택의 결과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모든 행위를 두고 어떤 인간이 감히 하자가 있고 불공평하다고 반문한다는 말입니까? 만약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인간들이 어떤 돼지는 도축하여 고기로 먹고 어떤 돼지는 생명을 다할 때까지 살려둔 것을 두고 돼지들이 불평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의 논리는 명쾌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9:20~21)

 

 

다음으로 내적 소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죄인의 마음속에 복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감화케 하며, 구원에 이르도록 효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소명은 죄인의 마음을 움직여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는 뜻에서 유효적 소명’(effective calling)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누구는 외면하지만 성령의 내적 소명을 받은 사람은 적극적으로 마음을 돌이켜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 갑자기 하나님 말씀이 귀에 들리고 믿어지고 마음에 감동이 생기고 자신의 추악한 죄들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가를 깨닫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 이 놀라운 부르심으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부르심으로 우리는 각자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세상에서 구별되어지면서 동시에 세상 나라 소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부르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둘째, 이 부르심은 영원토록 취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11:29)

 

셋째, 이 부르심으로 모든 신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사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넷째, 이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2:12)

 

 

 

5. 결어

 

 

그러나 안타깝게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일마저 다 알고 예정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22:14)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9:27)(10:22)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택함을 입어 부르심을 받고 지금 이 교회당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 자체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감격해야 합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은 일이 내게 일어난 것입니다. 할렐루야,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진심으로, 열렬하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럼에도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사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름표를 가졌다는 것은 누구 앞에서도 그 신분을 당당하게 내보인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름표는 공적인 신분에 대한 의무감이 함께 부여됩니다. 사관학교 생도들은 여타 일반 대학생들과는 다르게 가슴에 명찰을 부착하고 다닙니다. 그것은 나는 사관학교 생도임을 공표하면서 동시에 생도에 맞는 언행심사를 가져야 하다는 책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예전보다 조금 더 불량(?)해 진 것은 옛날처럼 교복에 이름표를 달고 다니지 않아서라고 말합니다. 나쁜 행동을 할 때 모든 인간은 자기 이름을 숨깁니다. 인터넷상에 댓글을 달 때 실명으로 댓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 이름값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자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모두의 이름인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이름의 영예를 드높이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아멘.

 

[출처] 17주차. <구원론강설> 하나님이 부르시다 2020. 4. 26.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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