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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주차. <구원론강설> 왜 거듭나야 하는가?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0. 7. 23.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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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주차. <구원론강설> 왜 거듭나야 하는가? 2020. 5.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30:6)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라“(31:33)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2:1, 4~5)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별함이니라”(고전 2:14)

 

두 가지 차원의 중생

 

신학적으로 거듭남을 중생’(重生)이라 말합니다. ‘거듭나다는 말은 다시 태어나다라는 뜻인데 한자어로 재생’(再生)이 아니라 왜 무거울 을 사용하여 무거운 탄생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을까요? 저는 이것에 대해 이 새로운 탄생의 의미가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니기에 무거울 을 우리 선조들이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카보드매우 무겁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리가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 가를 가르칩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함부로 다루거나 홀대할 분이 아닙니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모든 사역을 우리는 매우 무겁게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거듭남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적인 사역이자 추악한 인간을 구원하는 가장 위대한 사역이므로 결코 가볍게 다루어선 아니 되는 신비한 출생이라는 점에서 선조들이 중생으로 번역한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한편, 성경에서 중생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개인적인 구원이고 다른 하나는 종말론적이고 우주론적인 중생입니다.

 

먼저 개인적인 구원을 이야기할 때 성경은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3:3)고 하였습니다. 이때 거듭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gennethe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genno라는 단어의 부정시제 수동형으로 우리 말로 태어나다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항상 위로부터라는 뜻의 anothen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입니다. 3:3뿐 아니라 19:11, 23절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from above)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9:11)

 

그러므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거듭난다는 것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탄생은 땅으로부터 나는 보통의 출생과는 전혀 다른 하늘로부터의 출생입니다(우리가 육생이 아니라 영생을 상징하는 세례일을 더욱 축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영원한 새 생명을 주입받아 지금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나 종말론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중생의 개념을 확대합니다. 이사야 65:17에서 새로운 하늘과 땅의 창조를 예언했고, 21:1~4에서 이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65:17)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1~2)

 

마태복음 19:28에서는 이 새로운 창조를 팔렝게네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했는데 이것은 세상이 새롭게 되었다로 번역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중생의 개념을 모든 신자들이 현 시점에서 경험한 초자연적인 어떤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19:28)

 

이런 차원에서 중생은 새로움과 연관됩니다. 이 새로움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적용되어 물과 성령 세례와 연결되어 이 세례를 통해 각자 거듭남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노덴위로부터라 하지 않고 다시혹은 새롭게로 번역하여 거듭나는 것을 새롭게 태어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2. 인간의 철저한 부패

 

그러므로 우리의 거듭남 곧 중생새로운 탄생이자 새로운 시대혹은 새로운 나라에로의 진입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보다 여러분 자신이 성령의 은혜와 역사에 의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믿어셔야 합니다. 나아가 이 새로운 인생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왜 이런 새로운 탄생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갈 수 있느냐 하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왜 거듭나야 하는가?”로 정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개인적인 거듭남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다시 인간론으로 돌아가서 인간이 얼마나 철저하게 부패되고 타락한 존재인가에 대한 선이해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사람이 전혀 부패된 일이 없다면 중생 혹은 영적 생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가 가다가 멈춰 선 것은 차가 고장났기 때문입니다. 이때 정비사가 차를 고쳐주어야만 합니다. 고장나지도 않은 차를 고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이 고장 났기 때문에 새롭게 고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고장이 난 것인 하면 완전히 망가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 고장난 것을 수리할 수 없을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특별한 사역이 없어도 인간 스스로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설 수 있다고 한다면 굳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인간을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알아서 천국으로 찾아 오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구원을 스스로 획득할만한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주님은 요 6: 65에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노력한다고 하나님에게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진리입니다.

 

왜 인간 스스로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누누이 강조하다시피 인간은 정말로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상태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님의 견해를 기초로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입니다.

~ 죽음은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을 뚜렷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2:1)

 

2) 사탄의 영에 속한 자, 곧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accord with)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탄의 종으로서 사탄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탄 즉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없는 자요 거짓의 아비라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하였습니다(8:44).

~ 디모데는 사탄에게 속박된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4~26)

~ 한편,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문제의 근원은 부모에게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에게 있는 것입니다. 또 나의 행동이나 환경이나 조건 등이 아니라 나의 본성이 나의 가장 깊고도 불순한 문제의 근원입니다. 나는 처음엔 좋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나중에 나쁜 짓을 해서 나쁜 본성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본성을 두고 이렇게 간파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아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니”(2:2~3)

 

3)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던 자였습니다.

~ 신기하게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영적 빛이 비칠 때 저항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는 어둠에 갇힌 자는 갑자기 찾아 드는 햇빛에 눈을 뜨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3:19~21)

 

4) 복음을 거부하던 자였습니다.

~ 사도 바울은 고전 123절에서 성령으로 아니하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지각은 어둡고 돌처럼 단단하고 거역하는 마음이 거세기 때문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누가 이것을 이해하리요”(17:9)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4:18)

 

5) 육신에 속한 자였습니다.

~ 성경에서 육신은 죄악을 실행하는 도구이자 주체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5:19~21)

~ 또 육신은 영적 생명(조에)을 잃어버리고 단지 육적 생명(비오스)만을 가지고 그 생명의 유지를 위해 활동합니다. 그래서 육신은 하나님의 일을 대적합니다. 육신의 일은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니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7:1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7~8)

~ 그러므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겐 선한 것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행을 한다며 성금을 내고 장학금을 기부하고 기부를 하고 이웃을 돕는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이러한 육신의 선행을 선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행동은 그것이 인간이 보기엔 선행이라 해도 여전히 하나님이 정하신 선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패한 음식을 이웃에게 아무리 많이 나누어준다 해도 그것은 선행이 아니라 부패한 음식을 통해 이웃에게 해를 끼칠 뿐입니다.

 

3. 거듭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가 왜 거듭나야 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 다섯 가지로 정리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거듭나기 전에 바로 이런 상태에 처했던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관점을 바꾸어서 거듭나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을 놓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다시 말해 거듭나지 않으면 어떤 손해를 보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선물을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됨을 알게 됩니다.

 

첫째, 거듭나지 않으면 믿음을 받지 못합니다.

~ 여기서 신학적으로 중생과 믿음의 관계를 정리해야 합니다. 구원의 서정을 다루면서 믿음이 먼저냐 중생이 먼저냐 하는 다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파 신학에서는 중생이 먼저라는 입장을 확고히 가지고 있습니다.

~ 2017년에 작고하신 유명한 개혁신학자이자 설교자였고 특히 리고니언 선교회를 이끌며 미국사회의 복음화를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R.C 스프로울은 이 둘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정리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하기 전에 타락한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선택할 능력이 있는가? ~ 믿음이 먼저이고 중생이 다음에 온다고 하는 것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기울여 그분에게로 가기로 결정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에드워즈 등 개혁파 신학자들 모두는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만약 이것을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저항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둘째, 거듭나지 않으면 칭의를 받지 못하고 영원히 정죄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 즉 칭의를 선포받은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의롭지 못한 사람은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천국에는 죄인이 앉을 단 하나의 자리가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의로움을 획득할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용서해 주시고 믿음을 주시어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15:6).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 무엇보다 거듭나지 못하면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은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히 그에게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진노는 지옥의 불로 나타납니다. 과연 어느 누가 불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장담하고 나는 괜찮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고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6:17)

 

셋째,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마귀의 자녀였던 과거의 신분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된다는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 우리 모두는 마귀에게 죄의 종으로 팔리운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마귀의 종으로부터 자유케 하시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도록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넷째, 거듭나지 않으면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 사도 바울은 우리가 거듭난 이후에 맺을 성령의 열매를 아홉 가지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5:22). 이 모든 성령의 열매들의 이름을 단 하나로 요약하면 사랑의 열매가 됩니다. 사랑이 아니면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5:6)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 2:11, 3:14)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4:11)

~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랑을 오, 남용하는 것에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무질서하고 무절제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두 속성 즉, “공의를 바탕으로 한 사랑이요, 사랑을 바탕으로 한 공의라는 이 원칙을 지킬 때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고의와 사랑의 실행법칙이 바로 신상필벌이요 상급과 형벌의 원칙인 것입니다.

 

다섯째,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보다 세상과 사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육신에 속한 자이고 육신에 속한 자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빠져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요일 2:16).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우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 천국의 기쁨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하나님과의 교제일 것입니다. 우리의 새 생명이 주는 기쁨의 절정은 하나님 바로 그분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그것 이상의 기쁨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속에 물든 자들은 이 기쁨을 모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세상의 것들에 미쳐서 천국의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어렴풋이나마 천국의 기쁨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세상의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고 믿습니다. 이 영원한 기쁨이 이미 거듭난 사람들 모두에게 주어졌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모든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 될 것입니다.

 

4. 결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거듭남에 대해 알아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 명제를 다루어 보았습니다. 하나는 왜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가?”를 다루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거듭나지 못했을 때 놓치는 놀라운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각각 다섯 가지로 정리하여 여러분에게 설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났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이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4~5절을 통해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우리는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한 사람도 자기가 위대한 일을 행하였거나 놀라운 업적을 쌓아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 전혀 요구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영적 생명, 곧 거듭남을 준다는 점에서 정말로 위대하고 놀랄 뿐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두고 사도 요한은 그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더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2)하고 토로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 각자는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라는 한 인격체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구조를 받아 이 자리에 앉아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둠에 갇혀 있을 때엔 이 모든 것이 생각나지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신세였습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으로 구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시어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시고, 전에 듣지 못했던 말씀들을 듣게 하시고,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하시고, 전에는 바라지도 못했던 것들을 바라보게 하시고 소망을 두게 하시고 새로운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서 생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늘에서부터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자들임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30:6)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라“(31:33)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2:1, 4~5)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별함이니라”(고전 2:14)

 

두 가지 차원의 중생

 

신학적으로 거듭남을 중생’(重生)이라 말합니다. ‘거듭나다는 말은 다시 태어나다라는 뜻인데 한자어로 재생’(再生)이 아니라 왜 무거울 을 사용하여 무거운 탄생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을까요? 저는 이것에 대해 이 새로운 탄생의 의미가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니기에 무거울 을 우리 선조들이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카보드매우 무겁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리가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 가를 가르칩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함부로 다루거나 홀대할 분이 아닙니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모든 사역을 우리는 매우 무겁게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거듭남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적인 사역이자 추악한 인간을 구원하는 가장 위대한 사역이므로 결코 가볍게 다루어선 아니 되는 신비한 출생이라는 점에서 선조들이 중생으로 번역한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한편, 성경에서 중생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개인적인 구원이고 다른 하나는 종말론적이고 우주론적인 중생입니다.

 

먼저 개인적인 구원을 이야기할 때 성경은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3:3)고 하였습니다. 이때 거듭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gennethe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genno라는 단어의 부정시제 수동형으로 우리 말로 태어나다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항상 위로부터라는 뜻의 anothen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입니다. 3:3뿐 아니라 19:11, 23절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from above)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9:11)

 

그러므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거듭난다는 것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탄생은 땅으로부터 나는 보통의 출생과는 전혀 다른 하늘로부터의 출생입니다(우리가 육생이 아니라 영생을 상징하는 세례일을 더욱 축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영원한 새 생명을 주입받아 지금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나 종말론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중생의 개념을 확대합니다. 이사야 65:17에서 새로운 하늘과 땅의 창조를 예언했고, 21:1~4에서 이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65:17)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1~2)

 

마태복음 19:28에서는 이 새로운 창조를 팔렝게네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했는데 이것은 세상이 새롭게 되었다로 번역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중생의 개념을 모든 신자들이 현 시점에서 경험한 초자연적인 어떤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19:28)

 

이런 차원에서 중생은 새로움과 연관됩니다. 이 새로움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적용되어 물과 성령 세례와 연결되어 이 세례를 통해 각자 거듭남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노덴위로부터라 하지 않고 다시혹은 새롭게로 번역하여 거듭나는 것을 새롭게 태어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2. 인간의 철저한 부패

 

그러므로 우리의 거듭남 곧 중생새로운 탄생이자 새로운 시대혹은 새로운 나라에로의 진입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보다 여러분 자신이 성령의 은혜와 역사에 의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믿어셔야 합니다. 나아가 이 새로운 인생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왜 이런 새로운 탄생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갈 수 있느냐 하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왜 거듭나야 하는가?”로 정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개인적인 거듭남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다시 인간론으로 돌아가서 인간이 얼마나 철저하게 부패되고 타락한 존재인가에 대한 선이해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사람이 전혀 부패된 일이 없다면 중생 혹은 영적 생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가 가다가 멈춰 선 것은 차가 고장났기 때문입니다. 이때 정비사가 차를 고쳐주어야만 합니다. 고장나지도 않은 차를 고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이 고장 났기 때문에 새롭게 고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고장이 난 것인 하면 완전히 망가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 고장난 것을 수리할 수 없을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특별한 사역이 없어도 인간 스스로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설 수 있다고 한다면 굳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인간을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알아서 천국으로 찾아 오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구원을 스스로 획득할만한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주님은 요 6: 65에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노력한다고 하나님에게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진리입니다.

 

왜 인간 스스로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누누이 강조하다시피 인간은 정말로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상태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님의 견해를 기초로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입니다.

~ 죽음은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을 뚜렷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2:1)

 

2) 사탄의 영에 속한 자, 곧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accord with)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탄의 종으로서 사탄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탄 즉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없는 자요 거짓의 아비라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하였습니다(8:44).

~ 디모데는 사탄에게 속박된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4~26)

~ 한편,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문제의 근원은 부모에게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에게 있는 것입니다. 또 나의 행동이나 환경이나 조건 등이 아니라 나의 본성이 나의 가장 깊고도 불순한 문제의 근원입니다. 나는 처음엔 좋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나중에 나쁜 짓을 해서 나쁜 본성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본성을 두고 이렇게 간파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아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니”(2:2~3)

 

3)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던 자였습니다.

~ 신기하게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영적 빛이 비칠 때 저항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는 어둠에 갇힌 자는 갑자기 찾아 드는 햇빛에 눈을 뜨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3:19~21)

 

4) 복음을 거부하던 자였습니다.

~ 사도 바울은 고전 123절에서 성령으로 아니하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지각은 어둡고 돌처럼 단단하고 거역하는 마음이 거세기 때문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누가 이것을 이해하리요”(17:9)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4:18)

 

5) 육신에 속한 자였습니다.

~ 성경에서 육신은 죄악을 실행하는 도구이자 주체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5:19~21)

~ 또 육신은 영적 생명(조에)을 잃어버리고 단지 육적 생명(비오스)만을 가지고 그 생명의 유지를 위해 활동합니다. 그래서 육신은 하나님의 일을 대적합니다. 육신의 일은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니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7:1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7~8)

~ 그러므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겐 선한 것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행을 한다며 성금을 내고 장학금을 기부하고 기부를 하고 이웃을 돕는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이러한 육신의 선행을 선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행동은 그것이 인간이 보기엔 선행이라 해도 여전히 하나님이 정하신 선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패한 음식을 이웃에게 아무리 많이 나누어준다 해도 그것은 선행이 아니라 부패한 음식을 통해 이웃에게 해를 끼칠 뿐입니다.

 

3. 거듭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가 왜 거듭나야 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 다섯 가지로 정리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거듭나기 전에 바로 이런 상태에 처했던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관점을 바꾸어서 거듭나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을 놓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다시 말해 거듭나지 않으면 어떤 손해를 보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선물을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됨을 알게 됩니다.

 

첫째, 거듭나지 않으면 믿음을 받지 못합니다.

~ 여기서 신학적으로 중생과 믿음의 관계를 정리해야 합니다. 구원의 서정을 다루면서 믿음이 먼저냐 중생이 먼저냐 하는 다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파 신학에서는 중생이 먼저라는 입장을 확고히 가지고 있습니다.

~ 2017년에 작고하신 유명한 개혁신학자이자 설교자였고 특히 리고니언 선교회를 이끌며 미국사회의 복음화를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R.C 스프로울은 이 둘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정리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하기 전에 타락한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선택할 능력이 있는가? ~ 믿음이 먼저이고 중생이 다음에 온다고 하는 것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기울여 그분에게로 가기로 결정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에드워즈 등 개혁파 신학자들 모두는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만약 이것을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저항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둘째, 거듭나지 않으면 칭의를 받지 못하고 영원히 정죄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 즉 칭의를 선포받은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의롭지 못한 사람은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천국에는 죄인이 앉을 단 하나의 자리가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의로움을 획득할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용서해 주시고 믿음을 주시어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15:6).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 무엇보다 거듭나지 못하면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은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히 그에게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진노는 지옥의 불로 나타납니다. 과연 어느 누가 불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장담하고 나는 괜찮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고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6:17)

 

셋째,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마귀의 자녀였던 과거의 신분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된다는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 우리 모두는 마귀에게 죄의 종으로 팔리운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마귀의 종으로부터 자유케 하시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도록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넷째, 거듭나지 않으면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 사도 바울은 우리가 거듭난 이후에 맺을 성령의 열매를 아홉 가지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5:22). 이 모든 성령의 열매들의 이름을 단 하나로 요약하면 사랑의 열매가 됩니다. 사랑이 아니면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5:6)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 2:11, 3:14)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4:11)

~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랑을 오, 남용하는 것에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무질서하고 무절제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두 속성 즉, “공의를 바탕으로 한 사랑이요, 사랑을 바탕으로 한 공의라는 이 원칙을 지킬 때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고의와 사랑의 실행법칙이 바로 신상필벌이요 상급과 형벌의 원칙인 것입니다.

 

다섯째,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보다 세상과 사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육신에 속한 자이고 육신에 속한 자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빠져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요일 2:16).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우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 천국의 기쁨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하나님과의 교제일 것입니다. 우리의 새 생명이 주는 기쁨의 절정은 하나님 바로 그분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그것 이상의 기쁨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속에 물든 자들은 이 기쁨을 모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세상의 것들에 미쳐서 천국의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어렴풋이나마 천국의 기쁨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세상의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고 믿습니다. 이 영원한 기쁨이 이미 거듭난 사람들 모두에게 주어졌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모든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 될 것입니다.

 

4. 결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거듭남에 대해 알아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 명제를 다루어 보았습니다. 하나는 왜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가?”를 다루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거듭나지 못했을 때 놓치는 놀라운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각각 다섯 가지로 정리하여 여러분에게 설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났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이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4~5절을 통해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우리는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한 사람도 자기가 위대한 일을 행하였거나 놀라운 업적을 쌓아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 전혀 요구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영적 생명, 곧 거듭남을 준다는 점에서 정말로 위대하고 놀랄 뿐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두고 사도 요한은 그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더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2)하고 토로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 각자는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라는 한 인격체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구조를 받아 이 자리에 앉아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둠에 갇혀 있을 때엔 이 모든 것이 생각나지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신세였습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으로 구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시어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시고, 전에 듣지 못했던 말씀들을 듣게 하시고,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하시고, 전에는 바라지도 못했던 것들을 바라보게 하시고 소망을 두게 하시고 새로운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서 생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늘에서부터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자들임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출처] 19주차. <구원론강설> 왜 거듭나야 하는가? 2020. 5. 10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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