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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주차. <구원론강설> 아들에 대한 사랑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0. 10. 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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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주차. <구원론강설> 아들에 대한 사랑 2020. 7. 12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4~18)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1~3)

 

 

1. 하나님의 가족

 

주님은 제자들과 헤어져야 할 때가 임박하자 제자들이 자신의 부재에 대해 근심하고 불안해할까 봐 제자들을 위로하고 믿음 안에서 확신을 주고자 노력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하늘로 올라가면 그 다음부터는 성령님이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니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14:25~28)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과의 이별로 인한 제자들의 슬픔을 다독거렸습니다. 이제부터 모든 일을 성령님이 대신할 것이라는 이 약속으로 인해 제자들의 슬픔과 불안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입장에서 가장 큰 확신과 위로는 이 땅에서 성령님의 도움을 받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관심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말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나라에 간다면 어떤 자격으로 간다는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싶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확신의 대답과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약속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함께 살 거처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이 약속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라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모아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14:1~4)

 

다음으로 사도 바울의 진술을 통해,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집에 거할 수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4~18)

 

위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격으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아 상속자로서의 지위와 신분을 가지고 영원한 삶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2.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러한 주님의 약속과 상속권에 대한 보증들이 모두 당신의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피력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1~3)

 

이 말씀에서 우리가 더욱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즉 양자가 된 사실을 선포하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미래에 누릴 축복이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 요한은 임 말씀을 통해 우리가 지으심을 받은 궁극적인 목적을 강조합니다. 그는 구원의 정접, 곧 우리가 누리게 될 가장 높은 영광에 관해 증언합니다.

 

사도는 이 사실을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보라”(ίδετε)라는 단어를 채택하여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이 단어는 가만히 멈추어 장차 일어날 일들을 깊이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놀라운 일을 계획하시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깊이 생각해 보라는 함의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범주에 속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고 모든 상속권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이 꿈꿀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알기 위해 사도는 우리에게 보라라고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동시에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라고 권고합니다.

어떤 일을 깊이 생각하기 위해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 움직이지 말고 단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만약 몸을 움직이거나 다른 일을 동시에 하거나 어떤 잡념에 사로잡히면 그는 깊이, 그리고 정확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대학입학시험장에서 문제에 집중하지 않으면 그는 정답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가장 큰 위험에 직면했을 때 소란스럽게 굴거나 위험요소를 부추기는 행동들은 다른 위험을 야기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적군이 집안에 침입하여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질 때 비밀방에 숨은 가족들은 손으로 입을 막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조용해야 합니다.

 

이런 장면이 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느닷없이 사나운 폭풍이 몰아쳐 왔을 때 예수님은 배 뒤편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제자들조차도 배가 침몰할까 봐 두려워할 정도의 광풍이었습니다. 공포에 사로잡힌 그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셨나이까?”하고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의 소란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위엄있는 목소리로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하시자 바다가 즉시 잔잔해지며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에는 실바람 한 점 없는 절대적인 정적이 흘렀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주님이 바람과 물 뿐 아니라 모든 자연 만물을 창조하신 주권자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다의 사나운 물결마저 주님의 명령에 굴복하고 조용히 하라면 조용히 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바람 한 점, 구름 한 점, 별들의 속삭임과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들 모두 주님의 명령을 듣고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왜 그들이 잠잠하고 조용해져야 하는 것일까요? 오직 주님에게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주만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자연도 이러할진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 우리는 얼마나 아버지 하나님께 집중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만큼 집중의 능력’(Ability of Concentration)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성공하느냐 아니냐 하는 능력의 차이가 이 집중의 차이에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집중의 능력을 향상시키느냐 하는 연구들이 한창입니다. 특별히 최근의 이 대표적인 연구이론으로 몰입이론’(Flow Theory)이 각광을 받고 있는데 이 연구는 두 가지 갈래에서 진행합니다. 하나는 인간이 어떤 순간에 가장 몰입하느냐, 즉 최고도의 위험에 직면했을 때 최고의 몰입도가 형성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몰입도를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하여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론들을 잘 활용하면 자녀들의 교육에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경이감의 상실

 

우리에게 베푸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정말로 사도 요한의 권면처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지를 보고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고 세상에 속한 자였으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대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를 따았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가 가운데서 우ㅠ리 육체의 욕심을 짜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니”(2:1~3)

 

이런 우리를 하나님이 입양하여 아들로 삼아 하늘에 속한 모든 축복을 받고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에베소서 다음 구절을 계속해서 읽어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2:4~6)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에 놀라워하고 살아야 합니다. 바닷물을 잠재우신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제자들은 놀라워하였습니다. “저이가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하고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놀라워해야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에 가야 할 우리를 천국으로 자리를 옮겨주신 것입니다. 지옥 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고 살아야 할 우리를 낙원으로 거처를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지옥 같은 이야기는 단지 겁을 주기 위해 꾸며낸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들은 성경의 이야기가 마치 소설 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재미 삼아 장난친 것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지켜봅니다. 이들의 말로가 무엇인지 하나님도 알고 주님도 알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홍수가 나기 하루 전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몇 해 전에 쓰나미가 동남아시아를 덮쳤습니다. 산더미 같은 바닷물이 해안을 덮칠 때까지 사람들은 낌새도 차리지 못하고 놀다가 다 쓸려 죽음을 맞았습니다. 불신자들의 삶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맙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이러한 경이감을 잃고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도 별로 놀라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쉽게, 또 자주 들어온 까닭에 우리 자신이 본질상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 속담에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잊고 산다는 말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기 전에 우리의 정체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듯합니다.

 

성경적으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당연한 듯 여기지만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양자의 개념은 그들에게 참으로 혁신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들을 자녀로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4. 성경의 사례: 므비보셋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예화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다윗과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의 우정과 사랑은 지극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은 슬퍼하며 그 유명한 활의 노래’(삼하 1:19~23)를 지어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이 애가는 요나단을 향한 다윗의 지극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26절을 봅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요나단을 사랑했던 다윗은 신하들에게 그의 가문 중에 생존자가 있는지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요나단의 아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가 바로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 아들 므비보셋입니다. 다윗은 즉시로 군사를 보내어 그를 찾게 하였고 마침내 므비보셋이 숨은 장소를 찾아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 왕의 군사들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그를 보호하고 있던 한 여인이 느꼈을 공포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언제 다윗왕의 군사들이 들이닥쳐 므비보셋을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았던 이 여인은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여차하면 자기 목숨을 끊어낼 준비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므비모셋은 다윗의 군사들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순간 므비보셋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잔인하게 살해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적장의 자손을 살려두는 법은 없으니까요. 결국 사로잡힌 므비보셋은 다윗 앞으로 갔습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하 9:6~11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모셋이여 하나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 지니라 하니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왕이 사울의 시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왼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모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 므비모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므비보셋은 왕의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먹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한두 번에 걸친 식사가 아니라 항상 함께 식탁에서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므비모셋이 다윗의 아들처럼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일화는 하나님의 양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성찬을 행할 때마다 므비보셋이 누린 특권을 생각하며 먹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지금 누릴 수 없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 제공되는 떡과 포도주는 아버지께서 특별하게 아들에게만 주시는 하늘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생각하고 믿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므비모셋이 왕의 식탁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이 므비모셋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다윗은 그를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오직 요나단에 대한 사랑 때문에 므비보셋이 특권을 누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성부가 우리의 맏형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의 가족이 되어 식탁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특권을 당연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며 기도할 때마다 그렇게 부를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두고두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정말로 사도 요한이 권면한 것처럼 이제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5. 결어

 

하나님의 가족이 된 이상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에게 낯선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오히려 이제 우리는 거꾸로 세상에 대해선 낯선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과는 이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이런 우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미움과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우리는 간혹 타협을 시도하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세상의 배척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세상의 관심과 칭찬을 듣고 싶어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듣고 싶어서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고 선포하는 일을 꺼려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세상의 눈치를 살핍니다. 그런 방식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하고 합리화하면서 복음의 소리를 닫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만 취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관계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좋은 친구는 좋은 일은 물론이고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친구의 유익을 위해 고난을 즐겨야 합니다. 단맛만 찾아다니며 힘든 일을 외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친구가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해야 합니다.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 살아야 합니다.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양자교리가 주는 특별한 교훈입니다. 아멘.


[출처] 28주차. <구원론강설> 아들에 대한 사랑 2020. 7. 12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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