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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차. <구원론강설> 이신칭의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1. 2. 25.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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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차. <구원론강설> 이신칭의 2020. 7. 26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니라”( 10:19~22)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2:16)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로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3:5~7)

개혁교회의 핵심적 교리

개혁교회라는 용어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로마 카톨릭교회를 대항하여 일어난 루터주의와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대륙의 개혁교회와 스코틀랜드를 거점으로 하는 장로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스위스의 제네바를 중심으로 확산된 칼빈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는 교회를 개혁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개혁교회의 역사적 전통은 제네바와 헝가리, 루마니아, 화란과 남아공. 프랑스의 위그노, 영국의 청교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인들, 독일의 모라비안 등을 포함한 일부 개신교인들,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 호주, 그리고 일본과 한국교회들까지 실로 전세계적인 범위에 확산된 교회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런데 이들 개혁교회들, 즉 루터파, 장로파, 개혁파를 포괄하는 핵심적 사상을 들라면 그것은 바로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상입니다.

종교개혁시기에 이 사상이야말로 기존의 부패하고 타락한 로마 카톨릭교회를 개혁하고 갱신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는 유럽 대륙을 강타했습니다. 사도 이래 전례없는 권세와 능력으로 교회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시 카톨릭교회의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보던 사람들이 새로운 구원교리에 빛을 보고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든 율법적인 행위와 공로를 요구하던 카톨릭교회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이신칭의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의 복음만이 죄인에게 참된 구원과 자유를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드디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이신칭의의 교리는 교회사의 유물이 된 듯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위대한 이신칭의의 사상은 많이 퇴색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청년들에게 칭의가 무엇이냐 물으면 매우 낯설어 합니다. 그만큼 기독교 신앙이 세속화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낙스신학교의 교수였으며, R.C 스프라울의 스승이기도 하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신학>의 저자였던 존 거스너(J. Gerstner, 1914~1996) 박사는 자신이 어느 날 한 세미나에 참석해서 칭의 교리를 가지고 열심히 강론했는데 다음날 지역신문에 관련기사의 제목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고 했습니다. 기사 제목이 칭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그냥 휴가떠나기였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신학자의 담론을 그저 일상적인 대화 정도로 치부해 버릴 만큼 오늘날 기독교의 핵심적인 구원교리가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불변의 법칙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구원의 법칙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법칙을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신칭의의 구원법칙입니다.

 

 

2. 이신칭의란?

성경은 이신칭의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합니까?

1) 먼저 성경은 칭의가 우리의 난제인 죄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말을 합니다.

~ 그러므로 죄를 바로 알아야 칭의를 이해합니다. 19세기 유명한 개혁주의자인 존 라일은 <거룩>에서 죄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칭의나 회심이나 성화와 같은 교리들은 그저 우리 인간의 지성에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하는 단어나 명칭이 될 뿐이다고 하면서 오늘날 모든 이단과 거짓 교리들은 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원인이라고 갈파했습니다. 예를 들어 심각한 악성 종양에 걸린 암 환자가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러 갔는데 의사가 단순한 질병이라고 오진했다고 가정해 본다면 잘못된 진단이 가져올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짐작할 것입니다. 정작 환자는 죽음 직전에 처해 있어 당장 수술을 받아야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상황임에도 천하태평으로 있다면 그의 생명은 회복되지 못할 것입니다. 죄의 문제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들은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양심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무서운 독버섯이 자라고 있음에도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3:9~12)

~ 지금 누구에게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까? 자신들은 선민이며 율법을 가진 특별한 백성으로서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며 양심적인 민족이라고 자신만만 하는 유대인들을 앞에 두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양심 운운하고 자신은 선한 사람이라고 자고 하는 요즘 사람들하고 다른 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너무나 냉정합니다.

2) 다음으로, 칭의는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위입니다.

~ 칭의는 인간의 행위나 공로와 관계없는 오직 하나님만의 의로운 판단이시자 뜻이자 거룩하고 완전한 행위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하나님을 재판장으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원래 칭의는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우리는 피고인이며 우리를 대적하는 사단에 의해 죄목들이 정해지고 고소를 당했습니다. 이때 재판장인 판사에게는 두 가지 판결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죄‘(guilty)이고 하나는 무죄‘(innocent)’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바꾸면 하나는 정죄이고 하나는 의롭다 함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법정에서 유죄라면 감옥살이를 하거나 사형을 당하지만 하나님나라의 법정에선 지옥행이고, 무죄라면 세상 법정에서 죄인의 결백이 입증되지만 하나님나라의 법정에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질문이 뒤따릅니다. 하나는 누가 의롭다함을 받느냐이고, 두 번째 질문은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의 무엇을 보고 의롭다해 주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이 이신칭의의 핵심입니다.

~ 첫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로마서 8 33~3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늘 본문으로 소개한 갈라디아서 2 16절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오늘 본문으로 소개한 마가복음에서 부자는 자신의 율법 행위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요구를 하시자 부자는 바로 그 지점을 넘어가지 못하고 돌아섰습니다.

~ 정리하면, ‘의롭다함  칭의를 받는 사람은 창세 전에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은혜의 선물이며 이들이 칭의를 받는 유일한 조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발견한 이신칭의 복음의 재발견입니다. 루터는 칭의는 인간의 행위가 개입될 수 없는 오직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며. 오직 믿음만 보시고 의롭다 해 주시는 법정적인 선언임을 천명했습니다. 그렇다고 루터는 칭의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운 자들이라 인정해 주셧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죄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칭의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를 두고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 칭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법적으로는 의인으로 칭함을 받지만 여전히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칭의의 위대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칭의는 즉각적이고 단회적이고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 믿는 즉시 의롭다함을 받고 일단 한 번 칭의를 얻는 사람은 다시는 그것이 취소되거나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신 일에는 취소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자신의 말을 뒤집는 분이 아니시고 상황에 따라 내로남불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3. 이신칭의를 부정하는 세력들

그런데 근자에 들어 개신교회 안에 이신칭의를 부정하고 한국교회를 종교개혁 이전으로 돌리고자 시도하는 작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중심에 소위 유보적 칭의론자’(reservation of justification)들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김세윤 교수와 그 제자인 권연경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말로는 이신칭의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일단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이신칭의만 강조한 끝에 교회의 심각한 타락을 불러왔다고 진단합니다. 그들은 망령되게도 이신칭의의 교리가 이 시대의 면죄부 값싼 은혜라고 공격합니다. ‘오직 믿음만 강조하다 보니 신자들의 거룩한 행위가 실종되었다고 고발합니다. 그래서 칭의는 거룩한 삶과 함께 보고 판단되어야 할 문제로서 칭의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종말에 가 봐야 알 수 있다고 하는 칭의 유보론을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칭의를 받은 사람이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는 칭의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견 일리가 있는 듯 해 보이나 그 숨겨진 의도를 들여다 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행위란 믿음의 보충이거나 칭의의 조건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유보론자들에 의해 크리스천도 지옥 갈 수 있다고 하는 이상한 주장들이 한국교회 안에 버젓이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성도들 간에 예수 믿어도 구원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뭐하러 교회 다니고 예수 믿겠는가?”하는 의문이 들불처럼 번진 것입니다. 이에 제가 몸 담고 있는 개혁신학포럼이 주동이 되어 세미나와 논문발표 등을 통해 칭의유보론자들의 주장의 맹점과 사악함을 고발하고 이신칭의 교리의 정당함을 변호한 바가 있습니다.

칭의란, 하나님이 우리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판결하시고 선언하시는 행동입니다. 다시 말해 칭의의 선언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하고 의롭고 정단한 신앙의 행위들, 이타적인 사랑과 선행과 공로 등의 조건을 보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내리시는 즉각적이고 단회적이고 영원한 편결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칭의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어떤 것을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칭의란 엄밀한 의미에서 법적인 선언입니다.

이 선언으로 죄인은 두 가지 변화를 받습니다. 하나는 죄인의 죄가 모두 용서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한 과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다면 어떤 죄인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합니다. 다음은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라는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굉장히 큰 죄인인 것 같지만 하나님이 무죄 하시므로 그 사람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저런 사람을 어재서 의롭다고 하시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반된 평가가 있을 때 어떤 평가를 믿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까? 내 머리로는 나의 양심과 이성적 판단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일이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머리로 이해를 해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의 한계가 있다면 바로 이성의 능력 밖의 일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차원을 초월해 계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만물의 영정이라면서 자기 능력과 재주를 제아무리 뽐낸다 해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능력 안에서 놀 뿐입니다.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이 주인의 명령에 대해 제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요”, 혹은 그런 명령은 합당하지 못합니다 등등 우기고 불평하고 불순종한다면 아마 주인은 그 녀석을 추방하고 말 것입니다.

 

 

4. 결어

마르틴 루터는 이신칭의는 기독교의 심장이요 기독교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넘어지게도 하는 교리라고 설파하였습니다. 참으로 깊은 혜안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신칭의에 대한 여러 흠집 내기와 공격들을 바라보면서 왜 사단이 이 교리를 허물려고 하는가를 여실히 알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세례와 함께 불같은 그 무엇이 내게 임하면서 마음의 회심과 회개와 뜨거운 눈물을 경험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라는 존재는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정말 추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나아가 내가 의롭다고 인정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될 수 있는 그럴 자격이 전혀 없는 하찮은 자임에도 나를 불러 주시고 믿음을 선물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의롭다 해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시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든 유업들을 이을 상속자로 삼으신 하나님 은혜에 목이 메어 밤새 울었던 우리입니다. 이런 우리가 이신칭의의 교리를 손에서 놓을 수 있다고 봅니까? 천만에요 사단이 제아무리 우리 손에 잇는 이 위대한 보물을 빼앗으려 한다 해도 하나님의 성령은 절대로 사단의 책력을 놓치거나 저들이 시도가 성공하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중 마지막 하나 더 추가할 것은 우리는 율법을 순종하는 일에 철저히 실패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18:5,  10:5)고 요구했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영원히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영원히 죄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넘어서 율법에 완전히 순종할 수 있는 방책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길입니다. 이 길에 있어서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복음 안에 승화시켜 동행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지시하는 모든 요구사항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무시하거나 페기 처분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모델하우스는 사라졌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모델하우스가 보인 구조와 내용과 하등 다를 것이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복음의 길에는 오직 자랑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일러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고 칭하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맏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루었습니다. 다음주엔 바로 이 속죄의 은혜와 그것의 전가를 다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덕분으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후로 자기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해야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자기 인생을 살려 하면 실패가 찾아 오지만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자는 번성하고 성공하고 복을 누립니다. 그런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출처] 30주차. <구원론강설> 이신칭의 2020. 7. 26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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