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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주차 <구원론강설> 의롭다고 여기시다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0. 10. 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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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주차 <구원론강설> 의롭다고 여기시다 2020. 7.1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9~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3~28)(참고: 2:16)

 

1. 죄인들의 운명

 

천국은 죄인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의로운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영생을 누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의로운 자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죄 아래에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 생선가게 아들로 자란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몸에는 늘 생선 냄새가 났습니다. 이렇게 죄인의 몸에선 죄의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죄악 된 것에 익숙합니다. 특히 로마서는 인간의 죄에 대해 조금도 주저함 없이 있는 그대로 진술합니다.

사람은 다 거짓됩니다”(3:4)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3:21)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6:23)

 

이 사망은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죄를 지었다는 것은 몸은 살았으나 영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불신자들의 상태가 그런 것입니다. 참 불행한 것은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언젠가 한 죽은 영혼들에 관한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특히 너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영혼들이 잠시 이승으로 가기 전에 호텔에 머물며 못다 푼 원한들을 해결하는 시간을 가지는데 그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은 죄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합니다. 그것은 지옥이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희망을 상실한 죄인들에게 희소식이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인들 중 몇몇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창세 전, 영원 전에 당신의 자녀들을 구별하여 택하시고 천국으로 부르시기로 예정해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예정하신 모든 뜻과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그 계획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어 그를 믿고 영접한 자들에 한해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계획이고 가장 위대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참으로 죽을 자에게 미친 구사일생의 소식입니다.

~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 토스토예프스키는 한때 반역죄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사형장에 끌려갔습니다. 그의 목에 밧줄이 걸리고 조금 있으면 형이 집행되기 직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황제의 특사였고 다급한 목소리로 황제의 명령이니 형을 멈추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사형을 면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사형당했다면 우리 손에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을 비롯한 위대한 작품은 없었을 것입니다. 실로 우리의 구원은 구사일생입니다. 그만큼 극적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늘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2. 구원의 시대

 

여기서 잠깐,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구원을 처음부터 다시 각색해 보겠습니다.

 

1) 먼저 구약시대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모든 계획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에게 적용키로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었습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자 구원의 방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면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왜 유대인들에게 주시고 지키라고 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을 따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누구도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인간의 죄가 얼마나 뿌리 깊은 근원적이고 치유 불가능한 것인가를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에 의하셔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임을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 깨닫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복음의 그림자요 예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치면 율법은 복음의 모델하우스에 해당합니다.

 

2) 드디어 신약시대에 접어들면서 율법 안에 예고되었던 메시아가 나타났습니다. 그분이 바로 인간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시자마자 절대 불변의 구원의 법칙을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자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이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 베드로 사도는 다른 이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4:12).

~ 사도 바울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소리쳤습니다(16:31).

 

이로써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오늘 소개한 본문 롬 3:21이제는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헬라어 원문은 뉘니 데’(Νυνι δε)인데 뉘니이제는이고 그러나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이 단어를 ‘but now’로 번역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지금 이 시대가 얼마나 은혜로운 시기인지 알고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에 사는 구약 백성들이 아닙니다. 더욱이 우리는 율법을 직접 수여 받은 유대인들도 아닙니다. 유대인을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이름도 없는 하나의 이방인들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복음이 들여와 우리 귀에 들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내 귀에 복음이 들리게 하시기 위해 수 없는 세월 동안 복음 전도자의 발걸음과 함께 하셨고 산을 넘고 강을 헤치고 바다를 건너고 도중에 수많은 전쟁과 살인과 저주와 방해와 핍박의 공포를 지나 여기까지 복음의 걸음이 당도케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3. 의롭다 하시다

 

알다시피 구원을 설명하는 여러 방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복음으로 부르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도록 하십니다. 이것을 소명이라 합니다. 이때 택한 자녀들은 성령의 조명하심과 세례를 통해 말씀을 믿게 되고그동안 죄인으로 살아왔던 삶을 뒤돌아보며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이었는가를 깨달아 회심하고 회개하고‘ ’거듭나고드디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우리가 다룰 바로 이것,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칭의‘(justfication)라고 하는 것입니다. 칭의는 두 가지 방면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1) 먼저, 칭의란 일단 의롭다 함입니다.

~ 이것은 의로워서 의롭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조건 일방적으로 의롭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종의 특별사면입니다. 사면이 되면 모든 전과가 소멸되고 원상회복됩니다. 죄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불의의 사고로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면 그 사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사면을 통해 형 집행을 면제받은 것이 됩니다.

~ 하나님이 택한 자녀에게 행하신 일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느 날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다음, 우리더러 이제 무죄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마치 법정에서 판사가 선언하신 것과 같다 하여 이를 법정적 선언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선언의 특징은 절대로 되물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혹자는 무죄 선언으로 사면을 받은 사람이 다시 같은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묻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무죄 선언은 아담으로 인한 원죄에 대한 죄책이 사라진 것을 말합니다. 원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그가 더 이상 지옥 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또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은 무조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이 땅에서 복된 삶을 누립니다. 이때 이 사람이 다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못하도록 성령님이 도우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천국에 이를 때까지 구원의 길에서 이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도의 견인혹은 구원의 보존이라 하는데 다음에 다룰 것입니다.

 

2) 칭의의 두 번째 요소는 값없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 당신이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마음으로 진실로 믿고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은 즉시로 당신을 의롭다고 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 그런데 교회사에서 이 은혜 구원에 대해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율법주의에 대항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의롭다 하실 리가 없다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상응하는 인간의 공로나 선행이 수반되어야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한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율법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 안에서 길을 잃고 아직도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 칭의 얻는 믿음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가 있기에 이루어지고 내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칭의를 구하는 자들은 칭의를 너무 어렵게 생각합니다. 이들은 자신이 어느 정도 하나님의 율법적 표준에 이른 후에야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육체를 수련하고 말씀을 암송하고 금식하고 도를 닦는 등 고행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 고행을 통해 심신을 수련한 사람에게만 구원을 허락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목표에 도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 마르틴 루터도 그런 가르침을 받으며 사제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511, 28세의 나이에 사제의 자격으로 로마교황청을 방문하고 교황을 알현하기 위해 빌라도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피가 나고 무릎이 깨어지는 듯 아팠습니다. 바로 그때 그의 마음에 롬 1:17의 말씀과 함께 구원은 믿음으로 되는 것인데 이런 행위가 구원에 무슨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그는 바로 일어나서 계단을 내려와 고국으로 돌아와서 진짜 구원은 참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드디어 1517년 종교개혁의 깃발을 치켜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복음의 시대, 즉 신약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8절부터 320절까지 모든 인류가 죄 가운데 빠져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었음을 설명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복음의 시대를 선포합니다. 그 선포가 321절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을 뉘니 데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과거에는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는 그런 시대에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분을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은혜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디카이오쉬네, righteousness), 완전한 하나님만이 가지는 의를 가리킵니다. 그런 의가 복음에 담겨 있습니다. 1:17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디카이오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오직 죄인들을 처벌하시는 무서운 심판자의 공의만 생각합니다. 마르틴 루터도 하나님의 의를 그렇게 이해하고 인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이 복음을 믿는 자에게 당신의 를 선물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값없이 은혜를 베푸시어 죄인을 의로운 자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주로만 기억한다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이 없다면 아무도 자신의 죄를 씻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중 롬 3:23~24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섭리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 아무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가 없이 모든 사람은 죄인들입니다. 그 실상들을 사도 바울은 낱낱이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한때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를 읽다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얼마나 제 자신이 부끄럽고 놀랐는지 한참 동안 정신 줄을 놓았습니다. 23절에 보니 저는 우상을 섬기던 자였습니다. 24절을 보니 저는 마음의 정욕에 사로잡힌 자였습니다. 26절을 보니 저는 부끄러운 욕심쟁이였습니다. 28절을 보니 저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던 자였습니다. 29절에서 31절을 보니 저는 모든 생각이 악한 자였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험담하고 비방하고 깍아 내리는 데 선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요 예수쟁이들을 놀리던 자요 교회가 사회의 독이라고 생각하던 자였습니다. 21절을 보니 저는 남을 판단하는 자요 25절을 보니 저는 고집스러운 자요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던 자요 7절을 보니 저는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39절에서 18절에 이르러서는 정말로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으며 그냥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20절의 말씀이 가슴을 찔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바로 그 순간, 저에게 강력한 생각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니까 예수를 믿어보자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에 대한 자포자기의 선언임과 동시에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한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어느새 죄의 짐을 내려놓고 주님이 주시는 자유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비록 육신의 삶은 고달프고 여전히 가난과 질병과 싸우고 있지만 갈수록 제 영은 맑아지고 하나님께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이 죄인에게 베푸신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할 뿐입니다.

 

둘째,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 죄인이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습니까?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비밀 중 하나는 하나님이 창세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자들을 미리 선택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 1:4~6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그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 하나님께 우리의 행위나 공로를 보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혹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할지 미리 아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예지예정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이미 예정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무조건 사랑하듯이 하나님은 창세 전에 당신의 자녀들을 택하시고 무조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 선택입니다(딤후 1:9, 9:11~12, 15~23).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데 무슨 조건이 필요하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모든 계획 중 가장 위대한 계획이자 뜻이자 섭리라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죄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죄 값을 다 치루셨다는 것입니다.

~ 대신 하나님은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시기 위해 하나님 자신은 희생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간으로 오시어 인간의 모든 죄 값을 대속하셔야 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서양 사람이거나 한 사람의 영웅이거나 성인쯤의 수준에서 논할 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 값을 대신 치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유월절 어린양이십니다. 모든 인류를 대신하는 대속물이자 희생제물입니다. 주님이 제물로 바쳐졌으므로 우리가 더 이상 제물이 되지 않고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3:13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념하는 성례전에 참예하는 것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이 흘리신 피의 값으로 천국의 만찬을 즐기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들이 부모들이 뼈 빠지게 고생해서 모은 재산으로 복을 누리는 것처럼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의 덕으로 우리가 구원의 복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넷째, 이를 근거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값없이 의롭다 하셨습니다.

~ 은혜는 복음의 정수입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자녀에게 은혜의 마음이 없다면 그는 진짜 부모가 아닐 것입니다. 자기 자식은 사랑하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다 하면 그는 진짜 사람다운 사람이 아닙니다. <천로역정>의 작가 존 번연은 <은혜로 구원받다>라는 책에서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호의에 의해서, 값없이 주시는 자비와 인자하심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고 설명했습니다.

~ 정리하면 이 말씀에서 반드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사실입니다. , 칭의는 은혜로 주어지기에 값없이주어집니다. 여기서 값없이 주어진다는 것은 우리 행위 없이 공로와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도로레안인데 이는 선물로라는 뜻입니다. 도로레안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4. 결어

 

청교도 토마스 왓슨(1620~1680)칭의를 무시하는 자는 얼빠진 사람이라고 하면서 왜 여러분은 구원하는 치료제가 있음에도 그것을 바라지도 않으며 죽어가고 있느냐?”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칭의를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칭의 얻는 유일한 조건은 오직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롬 322절을 보세요.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디아 피스테오스)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차별 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30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다시 내립니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아멘.


[출처] 29주차 <구원론강설> 의롭다고 여기시다 2020. 7.19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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