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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주차 <구원론강설> 의롭다 칭하시는 근거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1. 2. 2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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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주차 <구원론강설> 의롭다 칭하시는 근거 2020. 8.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롬 5:18)

 

다른 주장들

 

성경에서 칭의 교리는 어떻게 죄를 지은 죄인이 죄 사함을 받고 무한히 의롭고 공평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은총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다시 말해,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를 지어 정죄 받은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는가? 무슨 근거로 하나님이 전적으로 불의한 자들을 의롭다고 칭할 수 있는가? 하는 ‘칭의의 근거’를 다루는 것입니다.

 

이 칭의의 교리는 다른 구원론 교리들의 구심점이 됩니다. 칭의의 대상은 지난주에 살폈듯이 죄를 지어 완전히 타락한 상태에 놓인 인류입니다. 이런 죄인을 의롭다고 칭하여 주시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즉 십자가 죽음 때문입니다. 또 이 칭의는 그저 선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택하여 두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적용되고 실행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 결과, 죄인은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 성화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칭의의 완성은 모든 시대의 의인들이 변화된 육체로 부활하여 하늘의 영원한 기쁨을 경험할 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칭의 교리에서 따져 볼 논쟁거리가 제법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칭의는 죄인에게 일어나는 순간적인 사건인가, 아니면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계속 진행되는 사건인가. 만약 전자가 옳다면 칭의는 성화와 관계없는 선언에 불과한 것인가, 후자가 옳다면, 칭의와 성화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등등 논쟁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중에서 가장 핫이슈인 칭의의 근거가 무엇인가, 즉 칭의를 어떻게 해서 얻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알아봅니다. 교회사에서 칭의의 근거에 대해 다르게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첫째, 펠라기우스주의자들입니다.

~ 이들에 따르면, 바울 사도가 가르치기를 ‘의’는 유대인들의 의식법을 순종함으로써 얻어질 수가 없고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얻는 것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한 마디로 신학적 낙천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어거스틴과 동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펠라기우스(419년 사망)는 인간은 아담의 타락에 영향을 받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서 원죄 아래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본래적으로 올바르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들과 맺으시는 관계는 형벌적 요구를 강제하는 엄격한 율법적 관계가 아니라 탕자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이 관계를 기초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본을 따라 스스로 도덕적으로 진보하는 이들을 의롭다고 간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 16세기에 등장한 <소시니언주의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펠라기안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주장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우리 죄값을 치루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공격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가라앉혀야 할 진노 같은 것은 원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죄책이나 의와 같은 도덕적 속성들은 전가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각 사람은 자기 죄를 스스로 보상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 19세기 이후 등장한 <자유주의 신학>도 비슷한 칭의론을 주장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칭송을 받는 알브레히트 리츨(1889년 사망)이라는 사람은 “칭의의 배경은 하나의 거룩하심이나 진노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사랑의 관념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유일하게 합당한 관념이며 인자하신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조건 없이 용서하시고 그들과의 교제를 회복할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는 분“이라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하나님을 잘못 상상하여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거나 진노하시는 분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하나님의 바른 뜻을 알리신 것“이라 해석했습니다. 그러므로 리츨은 “칭의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죄인에게 전가하시는 방편인 법적 행위라는 견해는 완전히 그릇된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그의 견해를 정리하자면 칭의는 “죄 사함이나 죄에 대한 근본적인 의식의 근절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제거를 의미하는 것이지, 죄인에 대한 완전한 죄 사함의 법적인 선언, 즉 ‘의인으로 칭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과정 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들은 칭의 교리는 현대인들과는 거의 연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가 법적으로 전가된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공언합니다. 이들은 칭의란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주어진 것으로 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을 파멸로 이끄시는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922년에 죽은 라이먼 애벗 같은 이는 노골적으로 모든 사람이 날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 모두가 실상은 펠라기우스주의자이거나 이것의 영향을 받은 자들의 사상입니다.

 

둘째,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입니다.

~ 카톨릭에서는 칭의를 과정으로 보고 칭의는 시작에서 결말로 발전하는 것으로 봅니다. 종교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열었던 트랜트공의회(1546~1563)는 칭의를 세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즉 칭의의 준비와 시작, 그리고 증대로 나누었습니다.

① 칭의의 준비: 각 신자는 선행적 은혜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② 칭의의 시작: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은혜와 소망, 사랑을 세례 시에 수세자의 영혼 속에 주입하여 과거의 죄를 사하시고 수세자를 의롭게 만든다. 따라서 칭의는 단지 죄 사함만이 아니라 은혜의 자발적인 수용에 따른 결과이다.

③ 칭의의 증대: 칭의는 의롭게 되는 과정이다. 순례자가 천국에 가려면 칭의가 반드시 증대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과 교회의 계명을 준수하고 믿음과 선행을 동반해야 한다. 그래야 의가 자라난다. 한편 칭의는 중한 죄로 상실될 수도 있지만 고해성사로 회복될 수 있다.

~ 카톨릭의 칭의를 종합하면, 아무도 어떤 오류도 용납하지 않는 믿음의 확실성을 가지고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다고 알 수 없다고 전제하고 개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부합하는 선행으로 자신이 받은 칭의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들은 오직 죄인이 선행이나 믿음에 따른 적정한 행위 없이 믿음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하는 자는 파면에 처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셋째,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입니다.

~ 이들은 칭의를 하나님의 지혜로우신 우주 통치를 강화시키는 죄 사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칭의가 죄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킨다는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아담의 죄를 모든 인류의 죄로 여긴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를 모든 신자의 의로 간주하신다는 칼빈주의적 견해를 부정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거룩하지 않은 자를 거룩하다고 간주하신다는 주장은 반율법주의적이고 방탕하고 부주의한 사람을 부추긴다고 비난했습니다.

~ 감리교의 창시자이자 철저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인 존 웨슬리(1791년 사망)는 칭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① 하나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죄와 죄책에서 자유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이고,

② 다음으로 그들의 도덕적 성품을 개혁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면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루터의 견해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는 ”칭의의 행위로 말미암아 창조된 어떤 의도 믿음의 윤리적 혹은 도덕적 차원 때문에 실재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도덕적인 결과로 나타나지 않은 칭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칭의를 선언함은 의로운 삶을 사는 능력을 이미 주신 것이므로 의롭지 못한 삶의 책임을 인간이 져야 하기에 칭의는 결국 성화를 보고 판단할 문제로 본 것입니다.

~ 실제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은 늘 죄인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어하시어 죄인을 의롭다고 칭하여 주시지만 실제로 많은 인간들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함으로 인해 칭의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리처드 왓슨(1883년 사망) 같은 알미니안 조직신학자는 “모든 것은 인간의 책임”이라 전제하면서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에게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이들에게 전가된다는 것은 둘 다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비난했습니다. 유명한 찰스 피니(1875년 사망)도 같은 견해를 주장했습니다.

 

넷째, 해방신학자들이 있습니다.

~ 이들은 만유재신론의 입장에서 신학을 전개합니다. 즉 구원은 모든 인간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적인 구원이라 말합니다. 전 사회에 억압과 불평등과 자유의 상실 같은 부정의가 사라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을 통해 전체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것이 구원이라 말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칭의란, 결국 그리스도의 아가페적인 실천을 매개로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하고 이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사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신정통주의가 있습니다.

~ 칼 바르트(1968년 사망)에 의한 주장으로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영원히 택하시고 은혜로운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인류가 이 언약을 어겼는데 그럼에도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자 주님으로서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에게 친히 구속되시어 언약의 파기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칭의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언약을 완전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영원한 칭의의 작정을 계시하시고 죄로 인해 깨진 언약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인데, 여기서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은 자기를 부정하신 것이고 부활을 통해 자신을 긍정하시어 마침내 죄와 저주의 문제를 종식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르트의 칭의는 믿음이 주어지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작정 안에 계시된 것이므로, 그리스도에 의한 의의 전가가 아니라 깨진 관계의 회복이 관건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인간은 영원 전에 하나님의 결정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존재이기에 때가 되어 복음에 반응함으로써 이때 하나님은 칭의를 자신을 위한 실재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2. 바른 주장

 

그렇다면 가장 성경적인 칭의론은 무엇입니까? 모든 종교개혁가들은 칭의를 의에 대한 법적인 선언으로 보았습니다. 멜랑히톤은 “우리의 모든 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전가다”고 간단하게 정의했습니다. 칭의란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진기한 의를 입혀 주셔서 죄가 가려지고 용서되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진노가 사그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동시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신자들을 의롭다고 간주해 주시지만 여전히 각 신자 안에 남은 죄성들을 앞으로 처리해야 할 과제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완성자인 존 칼빈은 칭의를 “구원의 전 교리의 원리이자 모든 신앙의 기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칭의를 주입하는 것으로 본 카톨릭의 주장을 반대하고 하나님은 값없이 그리스도의 의를 죄인들에게 전가하심으로 그들을 의롭다 하신다고 선언했습니다. 모든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믿음을 통해 의롭다고 칭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의로움으로 신자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죄에 대한 용서와 죄책과 정죄가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영생의 축복을 누린다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칼빈의 공로는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의롭게 되는 것의 차이’를 설명한 것입니다. 이는 곧 앞으로 우리가 다룰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한 매우 적절한 언급이자 설명입니다. 칼빈은 성화와 칭의의 관계를 직사광선과 태양의 관계로 비유했습니다. 태양이 있기에 햇빛이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칭의가 있기에 성화라는 빛이 우리에게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다는 고전 1:30의 말씀을 근거로 “성화에 참예한 자가 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빛이 나타나지 않는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그리스도가 전가해주신 칭의라는 태양의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보다 더 명쾌한 논리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가르침을 보존하고 전수하기 위해 각 나라, 각 민족으로 분포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알맞은 신조와 신앙고백서들을 작성하여 우리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 1563년에 작성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합니다.

(문) 어떻게 당신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집니까?

(답) 하나님은 내게 아무런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오직 은혜로 내가 마치 전혀 죄를 짓지 않았거나 죄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순종하셨듯이 나도 온전히 순종한 것처럼, 내게 그리스도의 완벽한 만족과 거룩함을 허락하시며 베풀어 주신다

~ 1647년에 작성된 웨스크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33문은 이렇게 묻고 답합니다.

(문) 칭의란 무엇인가?

(답) 칭의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오직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가 믿음으로 받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당신이 보시기에 위로운 자로 받아 주신다

 

얼마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J. I. 패커 박사는 칭의에 대해 매우 간단하게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는 칭의에 해당하는 단어 두 개를 소개합니다. 하나는 히브리어 ‘째데크’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어 ‘디카이오’입니다. 둘 다 ‘선언하다’ ‘받아들이다’ ‘의인으로 취급하다’라는 법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를 기초로 하나님의 칭의 행위는 소극적으로는 죄인들이 율법적 행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특권을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고 풀이했습니다.

 

알다시피 복음은 칭의에 대해 분명히 선언합니다.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적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완전히 충족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죄인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죄인들의 죄를 묻지 않고 의롭다고 여기시는 까닭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다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 칭의의 근거

 

지금까지 칭의에 대한 여러 이설들을 알아보고 가장 서경적인 개혁주의적 입장을 알아 보았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과연 칭의의 근거는 무엇이라 해야 하는 가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아무런 근거 없이 죄인을 의인으로 대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만약 일방적으로 불공정한 결정을 내리시는 하나님이라면 사탄과 그 수하들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하나님을 참소하고 죄인들을 자기 수하에 감금시키려 할 것입니다. 이를 잘 아시는 하나님은 다음 세 가지를 근거로 우리를 의인이라 불러 주십니다.

 

첫째, 개인적인 자질이나 공로를 근거로 하지 않습니다.

~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개인적인 성품이나 자질을 근거로 의롭다 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시편 기자의 증언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 130:3)

~ 또 어떤 죄인도 개인적인 혈통이나 특권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자신이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유대교를 철저히 신봉하던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빌 3:4~5). 이렇게 고귀한 가문과 특권을 가진 유대인이었던 바울도 자신의 개인적 자격 조건은 하나님에게 열납될 근거로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냉철하게 판단했습니다.

~ 또 하나님은 율법의 행위를 근거로 의롭다 하시자 않습니다. 이전에 율법 선생이었던 바울은 하나님의 법을 완벽하게 순종해야만 의를 받을 자격을 보장받는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죄인은 율법 자체를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둘째,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의존합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근거로 죄인을 의롭다고 칭하여 주십니까?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의존한다고 가르칩니다. 칭의의 근거는 사람 중심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베드로는 간단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행 10:36)

~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좀 더 세분화하면 다시 두 가지 공로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①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완전하신 인간으로서의 고결한 삶을 사셨습니다. 사도들은 이런 주님의 삶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성취하셨고, 성부 하나님의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셨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5). 요한은 ”성자께서 늘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고“(요 5:30),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했으며(요 4:34, 6:38, 17:4), 성부 하나님의 계명에 전적으로 순종했다(14:31, 15:10)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예수님의 삶을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히 7:26)로서 ”완벽한 순종“, 그리고 ”온전하게 됨“(히 10:7)이라 증언하였습니다.

② 두 번째 그리스도의 공로는 십자가에서의 순종적 죽음을 꼽습니다. 이 십자가 죽음을 근거로 하나님이 죄인을 의인이라 칭하여 주시는 근거로 삼은 것입니다. 사도들도 이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고 하였고, 사도 요한은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것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고 했으며, 바울 사도는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었다”(롬 5:9)고 증언합니다. 나아가 롬 5:18~19에서 주님의 피 흘리심을 ”의의 한 행동“이라 표현하면서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에게 죽기까지 순종하셨음을 증거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법적인 결제, ‘의의 전가’ 때문에 죄인을 의롭다고 하십니다.

~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의로우시니 하나님에게는 어떤 하자나 결격사유가 없습니다. 완전하고 무한하며 영원한 거룩이시오 공의로우시며 사랑이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런 하나님의 ”우리의 의가 되신다“(렘 23:6)고 노래하고,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사 61:10)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45:25)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옷을 입힌다’는 것은 백성의 죄악을 상징하는 ‘더러운 옷’ 대신에 흰 예복, 즉 하나님이 입혀 주시는 ‘의의 옷’으로 갈아입히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의의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완벽한 ”의의 전가“를 발견합니다.

~ 신약에서 바울은 이런 선지자들의 구원의 노래에 화답하듯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롬 1:17)는 이신칭의의 원리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 바울 사도는 나아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1~24절)과 다윗(6~8절)의 예를 들면서 칭의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는데, 이 장에서 바울은 동사 ‘로기조마이’를 11회나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원래 ‘장부에 기입하다’ ‘계좌에 들어 있는 것으로 쳐준다’ 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울의 의도는 성도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까닭은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를 그들의 장부에 기입하여 그것을 근거로 회계를 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장부에 기입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공로가 죄인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100억을 갚아야 하는데 부채를 진 사람의 통장에는 아무런 돈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빚을 다 탕감하셨으므로 그것의 공로가 내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갑자기 통장에 100억이 이체되어 돈을 다 갚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단어가 바로 ‘로기조마이’라는 것입니다.

 

4. 결어

 

이제 이 정도 칭의의 근거에 대한 지식을 가진다면 하나님이 우리더러 의롭다 하신 것을 두고 몰이해나 다른 주장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공로 없이 주님의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피의 구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첫 죄를 인류에게 전가 시킨 것과 같은 값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완전한 의의 공로를 죄인들에게 그대로 전가 시켜셨습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롬 5:1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렇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거로 신자들을 의인의 반열에 세우십니다(카디스테미).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 피 흘리심을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공의가 완전히 충족되시어 죄의 값이 다 치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모든 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대우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죄인은 그가 어떤 죄인이든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사실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계시해 주셨습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즉시 회개하십시오. 지금 즉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십시오. 지금 즉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 믿음으로 당신은 더 이상 더럽고 추악한 존재가 아니라 의로운 존재가 됩니다. 아멘.


[출처] 31주차 <구원론강설> 의롭다 칭하시는 근거 2020. 8. 2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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