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는 것이 어떤 사람을 비통하게 하지 않는다(2020.5.31.)
봉독: 출15:22~27, 히12:1~17, 룻1
본문: 룻1:20,21
시9:1,5,6, 찬송 10:1,9,10, 찬송 30:1~3, 30:7 찬송 48:3,4
성경 시대에 이름과 관련된 의미는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전 설교에서 우리는 엘리멜렉과 베들레헴 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엘리멜렉이란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의미였습니다. 베들레헴은 ‘빵의 집’, 곧 ‘곡창지대’라는 의미였습니다. 그곳에 아이러니하게도 기근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룻기 첫 장의 말미에 나오미라는 이름이 나오고 마라라는 이름도 등장합니다. 나오미는 ‘기쁘다’는 의미입니다. 마라는 ‘비통하다, 쓰라린 마음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나오미가 기쁨이라는 자기 이름은 더 이상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비통하다, 쓰라리다는 의미의 마라라는 새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바랐습니다.
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느니라.”(20절 하)
나오미는 새 이름 마라가 자기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를 마라로 불러주세요. 이는 전능자가 나를 망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동안 겪은 일을 돌아보면 이곳에서 나갈 때 기쁨으로 나갔는데 전능자가 나로 텅텅 비어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오미의 고백입니다.
나오미가 바뀌었습니다.
10년, 15년 전의 나오미가 아닙니다.
그녀는 변했습니다. 나오미가 이렇게 될 줄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지금은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마라라고 불러주세요, 나를 비통한 여인이라고 불러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나오미의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나오미가 너무 안 됐고 짠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어떤 일을 경험했습니까?
그 경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모든 것이 즐겁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오미처럼 마음에 쓰라린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쓰라리게 하는 것은 질병일 수 있습니다. 빈곤이 우리 마음을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습니다. 직장을 잃고 일자리가 없어지고 사업이 무너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 역병과 같은 전염병일 수도 있고 갑자기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쓰라린 결혼의 실패도 많습니다. 자녀를 갖지 못하거나 가족 간의 갈등도 심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의 삶과 인생을 쓰라리게 해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기대했던 대로 앞날이 펼쳐지지 않으면 속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것이 내가 소망한 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을 비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비워졌다 해서 사람이 비통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경이 닥치고 비워졌다 할지라도 그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히려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온전한 축복의 경험을 하도록 준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저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비워지는 것이 마음을 쓰라리게 만들지 않는다.
누가 비난(힐난)할 수 있는가?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누가 비난할 것인가?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에게는 정서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몇 년 전 그녀가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산 여성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당시 그녀에게는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함께 했습니다.
베들레헴에서는 당장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생각하고 빵의 집을 떠나서 보다 나은 앞날에 대한 기대를 안고 모압으로 떠났습니다.
모압으로 가기 전에 함께 하던 이들과 슬픈 작별을 했고 친구나 친지 중 어떤 이는 그런 시기에 그런 선택을 한 것에 대해서 우려 섞인 충고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비교적 젊었기 때문에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시작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그들이 기대한 방식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오미는 홀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손에 가진 것이 없이 빈털터리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 가까이 올수록 많은 추억이 홍수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녀가 소녀 시절 자란 오래된 집이 생각납니다.
남편 엘리멜렉의 땅 에브라다 농장이 생각납니다.
종종 여인들과 함께 얘기 나누고 웃곤 했던 베들레헴의 길거리, 그녀가 물을 긷던 동네 우물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베들레헴에 들어서자 그곳의 몇 사람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남자들은 보리 수확하러 들에 나갔을 것입니다. 동네에는 예전에 늘 소란을 떨며 기분을 상하게 하던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론보다 몇 살 어린 참했던 소녀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누가 압니까? 혹 인연이 닿았다면 마리아가 말론의 아내가 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마리아는 한 아이를 안고 있습니다.
뒤에 한 명이 또 있습니다. 그리고 나오미와 친했던 어린 시절 친구 디나가 있습니다. 그녀는 15년이나 지난 지금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옆에 세 명의 손주를 제외하고는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신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동네 골목길을 향해 걸어가는데 어떤 여인들이 자기들끼리 물어봅니다.
저 사람들은 누구야?
누구 집에 가는 거야?
노인은 낯익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걷는 모습이나 얼굴이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잠깐만...옛날 윗집에 그 나오미 아니여?
나오미? 그럴 리가 있는가?
맞아! 나오미야!
그러면 엘리멜렉은 어디에 있어?
그 아들 말론과 기룐이는 어딨어? 많이 컸겠다.
그리고 저 젊은 여자는 누구지?
하지만 여러분! 나오미가 맞습니다.
모든 동네가 갑자기 술렁거립니다.
흥분의 도가니가 됐습니다.
그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갑니다.
얘! 너 그 소식 들었어? 나오미 말이야?
나오미가 글쎄 돌아왔대.
근데 혼자! 그것도 함께 온 소녀가 있는데 모압 소녀야.
여러분! 나오미가 다시 돌아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기뻐합니다.
“나오미! 어떻게 이렇게 왔어?
너무 오랜만이다! 그래 나오미 어찌 지냈어? 남편은 같이 왔어?
말론은 결혼했어?”
“그래 나야! 나 나오미야.
그런데 여러 해 전에 떠날 때의 내가 아니야.
...음,,,일들이 잘,,,안 돼서”
“근데 남편은 어딨어?”
“응? 남편? 죽었어!! 두 아들도 다 죽었어”
“뭐??”
“나를 이제부터 나오미라 부르지 마!
나를 즐거운 여인이라고 부르면 내 마음이 너무 부담스럽고 내게 잔인한거야. 왜냐하면, 나는 전혀 기쁘지 않거든. 그러니 나를 마라라고 불러! 나를 비통한 사람이라고 불러줘!
내가 풍족하게 나갔지만,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어.
그분이 나를 대적하셔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벌하셨어.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어.
그러니 나오미라 말고 마라라고 해!”
실제 나오미의 마음은 너무 비통했습니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녀가 살면서 지키고 싶었던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이제 누구를 비난해야 할지 알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전능하신 여호와 엘 사다이로부터 온 어려움들이었습니다.
그녀의 생각에 여호와는 그녀를 대적하셨고 그녀를 가혹하게 벌하셨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경험한 어려움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녀가 경험한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옳은 판단입니다.
나오미는 그분을 전능자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
그녀에게 일어난 사건은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역경은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내주신 것이었습니다.
우연에 의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여호와의 손에 의해 모두 통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나오미가 어떻게 묘사했습니까?
룻기 1장 20절에 전능하신 분이 나를 매우 쓰리게 다루셨다고 말합니다.
21절에 전능하신 분이 나를 괴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13절(NKJV)에서는 “여호와의 손이 나를 대적하여 행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나오미는 모든 사건을 형벌로써 보았습니다. 자기가 당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신적 진노로 보았습니다. 그분의 분노나 거절하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증오하셨고 심판을 행하셨다”, “하나님께서 내게 화를 내셨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자신을 저주하신 이유이고 자신이 쓰리게 된 사유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오미가 이것을 옳게 보고 있는 걸까요?
그녀가 상황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있나요?
그녀가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비판하는 것이 옳은가요?
자신을 쓰라린 여인이라고 불러달라고 한 것이 옳습니까?
어떤 성경학자들은 나오미가 옳았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상황을 옳게 파악했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비통한 여인으로 부르라고 한 것이 옳았다고 말합니다. 자기 감정에 정직했다는 거지요. 그래도 여호와의 손길을 인정했다고 말합니다.
목사인 제가 볼 때도 나오미가 너무 안쓰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나오미가 말한 주장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나오미가 좀 더 성숙했으면 정말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가 자기를 마라라고 불러 달라고 한 것은 여호와의 손에서 받은 징계에 대한 올바른 고백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현실과 자기 가정의 유익만을 추구했던 나오미가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외치는 것은 내게 화가 임했다는 자기중심적인 외침으로 느껴집니다. 베들레헴 여인들은 나오미를 갑자기 보게 돼서 아무튼 반갑고 기뻤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에게는 자기 자신에 관한 생각이 전부였습니다. 자기의 고통과 자기의 쓰라림이 전부였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 여호와는 나에게 화를 내시고 그분은 나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셨지요.” (21절)(NKJV)
나오미의 말은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애초에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떠났던 죄에 대해서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엘리멜렉의 죄를 인정하지도 고백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며느리 룻의 존재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사랑의 헌신의 말을 룻이 했습니다. 그런 룻이 그곳에 없는 것처럼 자기 말만 합니다.
나오미는 여호와로부터 징계를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에서 “징계는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훈련받은 사람에게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도록” 계획되고 의도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아직 이러한 가르침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너무 압도되었습니다. 자기가 처한 현실적인 현실의 삶에 너무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그 상실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사랑의 언약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나오미는 그녀를 다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로 귀환시키시는 그분의 사랑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녀에게 룻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노년에 음식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작은 은혜겠습니까?
물론 나오미도 여호와를 전능하신 분으로 인식했습니다.
모든 세상 일이 여호와의 손끝에서 오는 것도 알았습니다.
여호와는 주권자요, 강력한 위대한 왕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손이 그녀에게 임했을 때, 힘든 불시험이 임했을 때 자신만을 바라보지 말고, 여호와를 전능자로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을 고백했더라면 더 적절했을 것입니다.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도 여호와는 주권자요, 우리 인생의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전능하신 분은 그분의 뜻과 목적을 위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그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그분의 자비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 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이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빼내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그 백성들에게 어떻게 인내하시며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기억했더라면 나오미가 자신의 비통한 현실에 주목하기보다는 전능하신 여호와, 구속주 되신 그분에게 좀 더 초점을 맞추었을 것입니다.
2.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오미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오미의 그동안의 삶은 즐겁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징계는 참으로 쓰라렸습니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고, 남편과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잃은 아픔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 “피곤하고 낙심이 될”때가 있습니다.
12절 “피곤한 손과 연약하게 된 무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라고 말합니까?
그런 일이 있으면 우리는 뭐라 말해야 합니까?
나를 마라라고 불러야 합니까? 아닙니다.
히브리서 12장 15절 하반절에서 마음속에서 “쓴 뿌리가 나서 자기 자신을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의 마음이 더럽게 될까 두려워하라”라고 합니다.
여기에 ‘쓴 뿌리’의 ‘쓴’은 ‘마라’와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소중한 것,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공허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이 빠지고, 비탄에 짓눌립니다. 그때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함께 짧은 기도마저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에 쓴 뿌리가 생겨서(히12:15) 어그러지고(13절) 다른 사람까지 더럽게 하지 말고(15절), (16절) 망령된 에서처럼 식물 한 그릇에 신앙을 팔아먹지 말고 위를 바라봐야 합니다!
여러분의 구속주가 전능자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서 거기 계십니다.
여러분을 위해 탄원하십니다.
여러분을 위해 중보 기도하십니다.
나오미가 전능하신 언약의 하나님께 이 같은 믿음으로 연결됐더라면 정말 멋졌을 것입니다.
나오미가 마라의 역사를 이해했더라면 자기를 마라라고 호칭해 주기를 요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광야에 마라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물이 쓰다고, 마실 수 없다고 모세에게 불평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투덜거렸습니다. 하나님의 그동안 행하신 일을 기억치 않고 어그러지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격 없고 배반하고 마음이 병든 백성에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물을 달게 하셔서 그들로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26절에 보면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여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나오미가 여호와께서 마라에서 계시하신 대로 여호와의 굳건한 사랑과 언약의 말씀을 기억했다면 히브리서 12장에서 말씀하는 의의 평강의 열매가 그녀의 마음에서 자라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마라의 사건이 있고 나서 바로 그 옆에 엘림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열두 샘물이 있었습니다. 칠십 야자수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서 야영을 할 수 있어서 안식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이르기도 전에 하나님의 위로와 선하심을 맛보도록 예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안 계시는 그런 어둠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그런 쓰라린 시간도 없습니다.
나오미는 여호와가 자기를 비어 돌아오게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기 인생을 쓰리게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오미가 비어져 온 것은 사실입니다.
자기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를 마라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비록 여호와께서 그녀를 비우게 하셨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분의 축복으로 그녀에게 채우기 시작하셨습니다.
보리 수확이 시작될 때 베들레헴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습니다. 믿음의 여인, 현숙한 룻을 며느리로 주셨습니다.
베들레헴 여인들이 나중에 뭐라 합니까?
룻이 일곱 아들보다 더 낫다고 말합니다.
나오미를 그 여인들이 만나서 기뻐할 때, 네가 나오미냐고 물었습니다.
나오미는 그때 새 이름 곧 마라로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래. 내가 나오미야! 나,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지만 나는 지금 그
런 식으로 생각지 않아! 왜냐하면, 내 인생이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이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야.
예전에 내가 잘 몰라서 육신의 남편과 자식만을 최고로 알고 여호와 하나님
께 쓴 뿌리가 나서 거스르며 살다가 내 죄의 결과 중 일부를 맛보았고 물론
매우 힘들었고 쓰라렸어. 내가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해서 인간의 불신앙으로
육신의 안식을 찾아 떠났잖아. 그때는 남편과 두 아들이 하나님보다 더 소중
했어. 그러나 전능자가 나를 다시 하나님 백성으로 돌이키셨어. 내 마음은
아프지만 여호와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전히 용서해 주시고 여전히
버리지 않으실 거야. 나는 이제 돌아왔어. 전능하신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셨
고 그분의 날개 아래 피난처를 주셔서 머지않아 마라가 아니라 정말 나오미
로 기억되게 하실 거야” 이렇게 고백했더라면 정말로 좋았을 것입니다.
룻기 4장에 보면 룻을 통해서 나오미가 한 아들을 얻게 됩니다.
이 아들은 나오미에게만 복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에게 복이 됩니다.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큰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나오미는 마라라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어질 때 여러분은 하나님 앞
에 어떤 반응을 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마라로 만들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하나님의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
거움(나오미)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절대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대신해서 진노의 쓴 잔을 마셨기 때문에 전능자가 여
러분을 쓰라리게 하셨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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