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려는 자들에게 머뭅니다(2020. 6.7)
본문 : 룻2:10~13
봉독 : 룻2:1~13, 엡2
시 57:1, 139:1,2, 17:1,3,4,6, 91:1,5, 57: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이 섬기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묘사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항상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친절하고 자애로운 분이라고 묘사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분을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여름 장마철 폭우처럼 예측할 수 없는 분으로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이 여러분의 유익과 영원한 복지를 염두에 두고 계신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신뢰하고 여러분의 삶을 주님의 손에 맡길 수 있는 확신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니면 결정적 순간이 오면 오르바처럼 그분께 자신을 못 맡기고 사람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더 의지하십니까?
그리고 교회 예배가 끝날 때 받는 축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수기 6장 24절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치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축복이 여러분에게도 주어지는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정말로 진심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그분의 얼굴이 정말로 여러분에게 비치고 은혜를 베푸십니까?
아니면 내 길은 주님에게서 숨겨져 있다고 느끼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너무 엉망으로 만들어서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나 호의를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두렵습니까?
주님의 날개가 부담이 됩니까?
하나님은 누구시며 그분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질의입니다.
그러나 이 질의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는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경험하여 이해하는 것을 기초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이해를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 이런 하나님이면 좋겠어라고 생각하면 위험합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 이런 식으로 예배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위험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경험이나 왜곡된 지성으로 하나님을 함부로 이해해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여러분을 부르셨고 하나님 말씀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 말씀을 지고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말씀에서 계시하신 대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말씀에서 계시하신 대로 결정적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나오미와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룻기 1장에서 룻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녀의 시아버지, 그녀의 아주버니 그리고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리고 가난하고 궁핍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베들레헴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거기서 나오미와 나오미의 백성에게 서약을 합니다. 나오미의 하나님께 서약을 합니다.
그러나 룻이 그곳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그녀를 위한 어떤 자리가 보장되어 있습니까?
여호와는 그분의 얼굴을 그녀에게 비춰 주시고 그녀에게 은혜로우시리라는 희망을 그녀가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녀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날개 그늘을 찾을 수 있었을까요?
과연 룻이 서약한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그 하나님의 백성에게 합류하겠다는 그녀의 결심은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아침에 저는 하나님의 언약 유지의 본질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 중 한 사람으로 소속되어 있을 때 확실한 축복이 반드시 함께 한다는 사실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려는 자들에게 머뭅니다.
은혜를 찾음
은혜가 나타남
은혜를 찾음
룻기 2장에서 계속 반복되는 단어는 “은혜”입니다.
2절에서 룻이 시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제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10절에 보면 이제는 룻이 보아스에게 묻습니다.
“내가 어찌하여 당신의 은혜를 입습니까?”
13절에서 룻이 또 말합니다.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나를 위로하시고 당신의 시녀에게 친절하게 말하셨습니다.”
이 문맥들은 은혜(호의)를 구하고 받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단어인 히브리어의 ‘호의’는 은혜, 친절, 그리고 긍휼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룻기가 이런 단어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룻이 어떤 돌봄이나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으로 베들레헴에 온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녀가 보리밭에 이삭을 주우러 갈 때도 반드시 모든 일이 잘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서 그 은혜를 바라고 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이 기대한 대로 정말로 여호와께서 룻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녀에게 호의를 보여줄까요?
아시다시피 룻은 하나님과 그 백성과 함께하기를 원했지만, 그녀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룻기 저자도 그녀를 룻이라 하지 않고 모압 사람 룻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1장 22절에서 모압 여인 룻이라고 말씀합니다. 2장 2절에서도 모압 여인 룻이라고 말씀합니다.
보아스가 그의 종에게 그녀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6절에서 사환이 대답합니다. “나오미와 함께 모압 나라에서 온 모압 젊은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2장 10절에서 룻이 뭐라 말합니까?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십니까?”라고 의아해 했습니다.
룻은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여호와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마음에 씨름해야 할 문제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내가 호의를 입을 것인가, 과연 내가 그분의 백성들에게서 은혜를 입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룻은 외국인이고 모압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룻에게 있어서 이는 매우 중요한 질의였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
그분의 백성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나님께서 모압의 딸을 그분의 백성 중 한 사람으로 기쁘게 받아주실까?
모압 여인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복을 감히 소망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의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룻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할 수 있고 하나님의 호의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룻이 하나님의 백성 중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분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는 이 특권은 그녀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런 특권이 주어진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과 모압의 관계는 좋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도중에 광야에서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때 모압은 이스라엘에게 먹을 것, 마실 것조차도 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압의 왕은 발람 선지자를 고용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민수기 25장에서는 모압 여인들이 이스라엘 남자들과 매춘행위를 했습니다.
그들의 신들에게 제사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모압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 24,000명을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엄히 명하셔서 이스라엘 사람은 모압 사람에게서 영원히 분리되어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23장 3절~6절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앞으로 10대 후손까지도 그리고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으니 너의 평생에 모압 사람의 평안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지니라.”
그때 이스라엘 사람과 모압 사람 사이에 영구적인 분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둘 사이를 분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압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습니다. 모압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흡수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룻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보호를 받으러 왔을 때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겠습니까?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이스라엘 땅에서 자신이 보호받기를 어떻게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날개 아래 돌봄을 소망하는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이러한 질의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서 어떤 일이 진행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낯선 이들에게 두려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외국인 혐오나 증오심이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 반대지요.
하나님은 나그네나 외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제정하시기까지 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는 마치 어떤 사람도 그분의 언약 안으로 데려와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만 특권이 있는 것처럼 주장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 오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뭐라 말씀하십니까?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나라가 복을 받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열방을 데려와서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는 계획이 구약에 여러 번 언급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압에 대해서 엄히 경고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거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구약의 교회는 주변 사람들의 생각과 세상 가치관에서 분리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압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모압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압과 분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모압 사람이 하나님과 그 백성의 호의를 입고 그분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과 하나님 자녀와의 관계에 쓴 뿌리가 되는 것을 완전히 거부해야 합니다!
모압의 뿌리를 부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입양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런 것을 룻이 원했습니다.
룻이 그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났습니다.
고향을 떠났습니다.
나오미와 하나님의 백성과 완전히 하나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룻은 모압 사람처럼 하나님의 교회에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룻은 더 이상 모압의 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 백성의 은혜를 구한 것은 잘 한 것입니다.
룻이 2장 2절에서 나오미에게 말하는 것을 보세요.
“제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나오미가 허락합니다. 룻이 하나님의 섭리로 보아스의 밭에 우연히 갑니다(2:3). 룻은 우연히 그곳에 갔습니다.
룻은 보아스가 누군지 전혀 모릅니다.
그 밭이 누구의 소유인지 모릅니다.
나오미가 거기로 가라고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은혜 가운데 룻은 우연히 보아스라는 경건한 남자의 밭으로 가게 됩니다.
당시에 돌봄을 받지 못한 자들이 이삭을 주울 수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약속의 땅에 사는 축복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가난한 자나 나그네가 이같이 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레위기 19장 19절 “너의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그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레19:9~10)
여러분! 룻이 이삭을 주우러 나간 것은 하나님이 규정에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주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삭을 줍는 것을 허용하는 율법은 레위기 23장 22절에서도 반복됩니다.
거기에 보면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절하시고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도 외국인에게 친절하고 은혜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항상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가난한 자 곤핍한 자, 압박받는 자들을 돌보십니다.
또한, 나그네가 됐든지, 외국인이 됐든지 하나님께로 나아오고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 되기를 원하면 그들을 돌보십니다.
그래서 룻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옳았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은혜를 소망해야 할 큰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의 이 모든 율법은 장차 오는 것의 그림자입니다.
에베소서 2장 7절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그분의 자비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은 그 은혜의 풍성함을 보여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은혜를 보여주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가도 아니고 우리가 행한 일 때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받으신 것은 그분이 누구시냐, 그분이 행한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니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 은혜가 나타났다.
이른 아침에 룻이 베들레헴 사람들이 곡식을 추수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떠나서 혼자 갑니다.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왔을 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들은 왼손에 보리를 잡고 오른손에는 낫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리 줄기를 잘라서 다북다북 안아서 줄을 맞춰 놓습니다.
그러면 여인들이 와서 곡물을 묶습니다. 나중에는 이 곡물을 한쪽으로 모아서 두들길 것입니다. 그러면 지푸라기와 보리와 왕겨가 나오고 그것을 채에 까불어서 알곡을 분리할 것입니다.
룻이 그 모든 일을 책임 맡은 종에게 다가가서 말합니다.
“나로 베는 자를 따라서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해 주세요”(2:7)
이에 책임 맡은 종이 허용을 합니다.
그래서 룻이 이삭을 줍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이 몹시 힘든 일이었지만 자기와 시어머니를 위해서 그나마 조촐한 식사를 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습니다.
물론 일하는 사람의 손에서 떨어지는 보리는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땅에 떨어진 보리 낱 알갱이를 하나하나 줍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열심히 주었고 잠시 쉰 외에 계속 일했습니다.(1:7)
수확하는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그렇게라도 주울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은 정말 감사한 거지요.
그녀에게 그런 호의를 베푸신 것은 여호와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때 보아스가 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나오미의 친족이라고 들었습니다. 엘리멜렉의 친족입니다.
큰 부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일하는 사람들에게 인사합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2:4)
그랬더니 일하는 사람이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멋진 인사말입니다.
여호와가 함께 계시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추수는 여호와에게서 온 것입니다.
이 인사말 후에 보아스가 룻을 발견합니다.
룻이 머리를 숙여서 등을 굽히고 간간이 떨어진 이삭을 줍습니다.
“이 젊은 여인은 누군가요?” 그가 묻습니다.
“이 여인은 누군가요? 뉘 집 사람이지요?”
일꾼이 룻은 모압 여인이라고 합니다.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그녀에게 말합니다.
상냥하고 은혜롭게 나의 딸이라고 부르기까지 합니다. 처음 본 여성에게 이렇게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뿐입니까?
2장 8절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여기서 네가 안전하게 돌봄을 받고 보호받도록 할 거다, 조금도 부끄러워 말고 목이 마르거든 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시면 된다.”(2:8,9)라고 말합니다.
이 배려는 룻에게 과분한 것이었습니다.
룻은 자기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람의 밭에서 이삭을 주우려 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이 남자가 자기에게 보여준 은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왜 저분이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래서 룻이 보아스에게 묻습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2:10)
보아스는 훌륭하고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외국인입니다. 그것도 모압의 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아스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아니야, 룻! 너는 외국인이 아니야. 내가 너를 나의 딸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아. 왜냐하면, 너는 이곳에 속한 사람이야. 내가 너의 모든 것을 들어서 알고 있어. 네 남편이 죽고 나서 얼마나 상심이 되었니. 그런데도 네 시어머니에게 네가 한 모든 것을 들었어.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오는 길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어. 나는 네가 여기에 속하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을 잘 알기에 너는 이제 이스라엘의 딸이 된 거야. 실제 엘리멜렉의 가족이잖아. 네가 참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너의 우상을 버렸잖아. 분명 여호와께서 너의 생각, 너의 행실에 보상해 주실 거야. 그분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여호와 하나님이 온전한 보상을 주실 거야.”
이 말이 룻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을까요?
정말로 복된 말입니다.
“룻! 너는 이방의 딸이 아니야. 너는 모압의 딸이 아니야. 너는 네 가족의 엘리멜렉의 품으로 돌아왔어. 너는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난처를 찾은 거야.”
더는 모압 사람에게 내려져 있는 저주가 룻에게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룻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룻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성도를 미혹하지 않습니다.
룻은 세상 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육신 적인 뿌리로 인해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그 백성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라합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리고의 가나안 여인이 수년 전에 하나님의 호의를 입었습니다.
그 라합의 아들이 보아스입니다.
룻이 그 보아스와 함께 아브라함의 자녀로 여겨졌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가 그녀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에 보응하기를 원하노라.”(2:12)
“네가 온전한 상을 받기를 원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룻에게 보상 받을 공로가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축복해 주셔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비로써 그녀에게 보상을 베푸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그녀에게 비춰 주시고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 앞에서 언약의 충실함 가운데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룻은 아브라함의 딸이 되었습니다.
룻은 하나님의 언약 말씀 가운데 그분의 날개의 보호를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하나하나 배워가고 알아갈 것입니다.
여러분도 룻처럼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룻기 2장 13절에 보면 룻은 보아스에게서 그런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여종의 하나와 같지 못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아스가 룻을 축복했으니 얼마나 위안이 되었겠습니까?
이와 같은 일이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물론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입었습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받은 은혜보다 훨씬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는 우리 속에 있는 선한 마음 때문에 주신 게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은”자들입니다.
본성이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때문에 이제는 외국인이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입니다. 하나님의 권속입니다(엡2:19).
약속의 언약에 외인이 아닙니다(엡2:12).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는 가까워졌습니다(엡2:13).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기대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그분께 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 영원토록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살핌을 받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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