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변함없는 언약의 헌신2020.05.24.(주)
본문 : 룻 1:16, 17
봉독 : 룻 1:1~18, 눅 9:51~62
시 108:1,2, 6:1,2,6, 61:1,2,3,6, 67:1,2,3, 87:1,2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분!
룻기 1장 16, 17절 말씀을 읽고 곰곰이 생각할수록 룻이 여기서 말하는 바가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고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룻은 나이 어린 모압의 여인입니다.
아이가 없는 과부입니다.
여호와의 은혜나 축복을 전혀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스라엘의 나이 많은 시어머니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1:16)라고 말한 후에 시어머니께서 죽는 곳에서 룻도 죽을 것이고 거기에 자신도 묻힐 것이라고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이렇게 룻이 나오미에게 충성심을 표현했습니다. 나오미의 하나님과 그 백성에게 헌신을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그 마음속의 깊이나 넓이를 헤아려 보면 너무 놀라운 고백이고 하나님 앞에 정말로 아름다운 최고의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룻의 이 고백을 읽고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당시에 그 말을 처음으로 들었던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접어들었을 때 두 자부 앞에서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시어머니로서 두 며느리의 한 달 후나 일 년, 이 년 후에 대해 생각할 때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나중에 베들레헴 사람들이 나오미의 사정을 듣고 룻의 말을 듣고 나서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그리고 룻이 자기가 말한 대로 실제 행동으로 옮겨서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 베들레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구약시대, 특히 사사 시대에 그런 믿음과 헌신은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의 하나님께 헌신하는 면에서 매우 망설였고 흔들렸습니다. 마음이 완악해져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좇지 않고 주변 나라의 잡신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불과 한 세대 전에 우리와 우리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장담했지만, 오히려 자기 하나님을 반역하고 언약의 하나님께 헌신을 저버렸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전체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는고 하니 룻기 1장의 엘리멜렉 가정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재앙이 닥치니까 약속의 땅을 외면했습니다.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에 기근이 닥치니까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짐을 싸서 떠났습니다.
자기 백성을 내팽개치고 떠났습니다.
모압 땅에서 빵을 찾기 위해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녀의 여섯 식구 중에서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이 남아서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별의 시간이 왔습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무거운 입을 엽니다.
“너희는 각자 너희 어미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동안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잘 대우해 준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잘 대우해 주시기를 원하노라”(룻1:8)
그리고 조금 후에 며느리 오르바가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추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룻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룻기 1장 14절 “그러나 룻은 그녀를 붙잡았더라”
룻이 시어머니를 ‘붙잡았다’고 말할 때 ‘붙잡다’라는 단어는 나오미에 대한 사랑과 애착을 의미하지만 룻의 충성심, 전적인 책임과 헌신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 단어는 창세기 2장 24절에서 한 남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서 그의 아내와 하나로 연합될 때, 즉 결혼에서 굳게 결합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또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 연합될 때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신명기 30장 20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 또 그에게 복종하라. 왜냐하면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기 때문이라”
여기서 ‘붙잡는 것’은 완전하면서 전적인 책임과 헌신의 마음으로 누군가를 붙들고 그와 속히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헌신(책임, 약속)이고 그 헌신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저는 다음의 주제로 말씀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견고한 헌신을 모압의 딸을 통해서 보여 주셨다」
이 헌신에는,
명확한 방향성이 있습니다.
값비싼 대가가 따릅니다.
이 헌신에는 명확한 방향성이 있습니다.
룻기 1장 외에도 누가복음 9장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주님께서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에게 다소 부정적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제자 됨의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지 않다”(눅9:62)
다시 말하면 뒤를 돌아보면서 동시에 직선으로 쟁기질할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세상 욕망으로 가득 차서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자는 둘 중 하나를 택하든지 전부 거절하든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을 분명하게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룻과 오르바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서 있습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들은 모압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의 어머니에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와 함께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오르바와 룻이 시어머니 앞에 서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10년이나 나오미와 함께 했습니다.
시어머니를 마음으로 사랑했습니다. 자기 어머니처럼 돌봐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어머니는 자기 고국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자기 백성을 찾아갑니다. 자기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두 며느리에게는 이국땅입니다. 남자 보호자가 없는 모압 여인이 베들레헴에서 산다면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도 없는 모압의 어린 여인이 이국땅에서 시어머니를 돌본다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일 겁니다.
젊은 여인이 이국땅에서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낯설어서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다 따져본 후에 시어머니가 이제 서로 길을 갈라서야 할 때라고 결정했습니다.
룻기 1장 8, 9절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 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 하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한 안식을 찾기를 원하노라”
여러분, 이 말이 이치에 맞는 말인지요?
그게 시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었을까요?
오르바와 룻은 훌륭한 며느리였지만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남편 두 사람도 죽었습니다. 자녀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만약 두 며느리가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간다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어떤 장래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안식을 찾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영구적인 거처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 어쩌면 더 나은 삶을 누리려면 그들이 각자 모압의 어미 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살면서 모압 남편을 찾아 가족을 양육하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내 딸들아 돌아가거라. 어서 가거라. 너희 백성에게 가거라. 그러면 아마도 여호와의 복을 받을 거다. 너희까지 내가 받은 저주를 받아서 되겠느냐”라고 얘기하는 것은 당연해 보이고 인간적으로 좋게 들립니다.
시어머니의 말이 이치에 맞는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생각하고 최고의 안녕을 기원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나오미의 논리가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보시겠습니까?
나오미는 옳게 결정했습니다.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돌아보시고 베들레헴에 곡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6)
그래서 마지막 여생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살기 위해서 가는 도중입니다.
나오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시어머니 생각에 오르바와 룻은 다른 곳에서 여호와의 복을 구하는 것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여호와의 축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오르바와 룻에게는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이 여호와의 백성이 되지 않으면 결코 여호와의 복을 온전히 받을 수 없습니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나오는 길에서 며느리들에게 말할 때 오르바와 룻은 선택에 기로에 있었습니다.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로 가든지 모압 쪽으로 돌아가든지 결졍해야 했습니다.
이 결정은 그들에게 일시적인 영향을 주는 게 아니었습니다. 영원히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 점을 놓쳐버립니다.
우리는 자기의 선택에 따라오는 그 결과를 잊어버립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과 함께하고 언약의 헌신에 서로 동참하도록 권면하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잊고 삽니다.
오늘 나오미가 그랬습니다. 만약 나오미가 운명적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자기 며느리에게 모압에 남도록 감히 권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녀가 이 운명적인 소중함을 통찰했더라면 그녀들의 백성, 그녀들의 신들에게 돌아가라고 절대로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돌아보신 베들레헴으로 함께 가자고 촉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만이 오르바와 룻이 하나님과 언약의 교제 안에서 복된 삶을 기대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오르바는 나오미가 말한 내용을 잘 들었습니다.
오르바는 눈물을 흘리고 나오미에게 입을 맞춥니다. 작별인사입니다. 그리고 어머니 집을 향해서 나오미를 멀리 떠났습니다.
오르바는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에서 멀어졌습니다. 언약의 교제에서 멀어졌습니다.
모압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언약을 맺으신 곳은 모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맺으신 곳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모압은 여호와의 복을 구할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바는 그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르바가 돌아간 후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그녀가 어떤 남자를 만났는지 모릅니다. 그녀가 어떤 자녀의 복을 받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녀의 결정이 궁극적으로 행복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이 놓쳐 버린 것이 무언인지 우리는 압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놓쳐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앞에서 사는 복된 삶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녀는 여호와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합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반면에 룻은 달랐습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고 백했습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며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거기 장사 될 것이라. 만약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
여러분!
룻은 두 길을 동시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언약의 헌신과 함께 그 길을 가거나 아예 다 부인하는 길을 가거나 둘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룻이 나오미에게 달라붙는다는 것은 우상 섬기는 자기 어미 집에서 돌아서고 나오미의 가족 가운데 새로운 가정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압의 백성과 모압의 유산을 뒤로하고 아브라함의 딸로서 이스라엘 나라의 시민으로 새로운 신분이 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을 룻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며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룻은 이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여러 해 후에 룻의 후손 중 한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적합지 않느니라”(눅9:62)
룻은 손에 쟁기를 잡았을 때 자기 결심을 합니다. 룻이 붙잡은 것은 단순히 나오미가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그들과 연합하여 살겠다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17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그곳에 묻힐 것입니다.”(룻1:17)
이것이 언약 결심의 굳건함입니다.
룻은 말로만 예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재앙을 만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룻이 현실적으로 자기에게 유익이 될지 안 될지 저울질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시했습니다.
여러분! 룻이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겠습니까?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선언할 때 그 의미를 모르고 했겠습니까? 물론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언약의 헌신, 언약의 책무가 무엇인지 온전히 이해하고 있습니까?
언약의 여호와께 우리가 마음과 뜻을 다해서 충성을 늘 고백하고 시편을 부릅니다.
또 그렇게 살려고 성경을 읽고 늘 예배에 참여합니다.
이것이 앞으로 우리의 운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있습니까?
세례예식서에 나와 있는 한 분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께 붙어 있어야 하며 그분을 신뢰해야 하고 온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정말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저는 못 합니다. 완전히 이해하고 그 후에 완벽하게 책무를 실행할 수 없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룻은 매우 현숙했고 강한 믿음을 가진 경건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이 그런 결정을 하고 그 길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선택이나 결심 이전에 성령 하나님의 강력한 사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그 언약 안으로 이끄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룻의 계보에서 태어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변함 없는 헌신을 앞으로 보여 주실 것입니다.
2. 값비싼 대가가 따른다.
주님과 그분의 백성에게로 언약에 참여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듭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고려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따를 때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을 경험이나 하나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난처를 찾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는 것처럼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나오미가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았어야 합니다.
오르바가 나오미와 함께하는 것의 가치를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믿음의 관점으로 자기가 당한 일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를 마음으로 따져보고 오르바와 룻은 모압에 돌아가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오미가 생각할 때 두 자부가 베들레헴에 가는 것은 그 대가가 너무 커 보였습니다.
그래서 “룻! 나를 붙들면 안 돼! 오르바가 그녀의 백성과 그녀의 신들에게 갔으니 너도 돌아가렴. 베들레헴에 가서 이 늙은이와 무슨 행복이 있겠냐? 룻! 그것은 너나 나나 서로 힘든 일이야. 룻, 너는 베들레헴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해를 못 하겠지만, 나는 알아. 너는 모압 여인이고 나는 이스라엘 사람이야.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에서 적응하려면 매우 힘들 거야. 그런데 너는 어떻겠어? 너는 과부이고 나는 그들에게 외인과 같아. 너를 누가 돌보며 누가 네 신변을 보호하겠니. 그러니 베들레헴에 가서 좋을 게 없어! 어떤 남자들이 네게 못된 짓 하면 어떻게 해? 그들이 너를 험담할 수도 있고 너에 대해서 없는 말도 만들어 낼 수 있어. 그런 일을 어떻게 감당하겠니? 아무쪼록 모압에서 여호와의 복을 구하고 여호와께서 네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 더 이상 나를 붙들지 마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베들레헴에 가는 것 외에 다른 소망이나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 말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세요? 제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모르세요? 저는 모압에서 더 이상 자리를 잡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제가 의지할 신이 없어요. 거기에 내 백성이라 할만한 사람이 없어요. 이미 저는 마음이 변했습니다. 성령께서 내 앞에서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붙잡고 어머니의 하나님, 어머니의 백성을 붙들겁니다.”
여러분! 시어머니 나오미는 아직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룻이 비탄에 잠기고 고통만 당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룻이 자기를 왜 좇으려(붙들려)하는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이 여호와께 헌신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그의 백성에게 헌신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룻! 네가 앞으로 치를 대가를 생각해 봐. 부질없는 짓 하지 마!’
이것이 나오미의 생각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여기서 교훈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오미가 잘못하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대단히 잘 못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녀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나오미는 룻이 여호와를 포기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모압에서 룻에게 복을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룻이 여호와의 백성과 합류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리석고 큰 죄지요. 나오미는 말씀이 없는 모압의 황무지에서는 하나님의 날개 그늘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모압에서는 룻이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 시 할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 룻은 하나님의 백성과도 동일 시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신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지만 교인들하고는 함께 하지 않을 거야.
나는 하나님을 믿지만, 교회는 안 나가!
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를 바라지만 우리 교회는 안 오면 좋겠어.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어! 우리 식구가 신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나는 이 교회 분위기가 싫어!’
여러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각 교회마다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아무튼, 예수님을 믿되 교회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런 의미입니다.
각자 보기 싫으니 따로 살자는 거지요.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생각입니다. 사단이 주는 생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디든 문제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별로 편하게 대우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문화적 기호를 만족시켜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게 매우 힘이 들 수 있습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는 자체가 모든 면에서 항상 마음이 편하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베들레헴은 힘들 거라고 말할 때, 이스라엘이라는 교회에서 헌신하기 위해서는 일도 해야 하고 자기 노모도 섬겨야 하고 교회에서 서로 돌아 봐주고 그러려면 때로는 눈물 이상의 어떤 아픔이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아픔이 있습니까?
가족에게도 각자 약점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각자 약점이 있습니다.
가족은 어떤 특이한 게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 내에서도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식구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신자가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걸림돌이 되는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 “나를 믿는 이 소자 중에서 한 명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누구든지 연자 맷돌을 목에 메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낫다”
교회에 소속되어 늘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왜 복이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된 지체입니다. 교회 안에서 주님의 성도들과 함께 영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 중 일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 교회를 진리의 영이 말씀으로 부양하고 인도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렇게 하십니다.
벨직신앙고백서 제 28항
“우리는 이 거룩한 집회와 회중이 구속받은 자들의 집합체이며 그밖에 구원이 없기에 아무도 그 모임에서 빠져서는(탈퇴해서는) 안 되며 그의 신분과 지위가 어떻든 간에 기꺼이 혼자 있으려 해도 안 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모든 사람 각자는 교회에 참여하고 교회에 연합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교회의 가르침과 권징에 복종시키며 그들의 목에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하나님께서 같은 몸의 지체로 그들에게 주신 재능에 따라 형제와 자매를 교정하는 일에 섬겨야 합니다.”
이 말씀은 교회 회원이 아닌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는 유일한 길은 특정 교회의 회원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저는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라는 벽을 초월해서 극적으로 역사하실 수도 있겠지만 요지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그분의 백성을 거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혼자 있으려 하지 마라. 말씀 중심으로 교회에 참여하고 연합하고 하나 됨을 지켜라. 그것이 큰 상이 될 것이라.’
그런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서 교회에 가고 안 가고 하는 것은 네 맘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부인하거나 멀리하면 큰 죄입니다.
나오미처럼 ‘나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거야. 너는 힘드니까 오지 마!’라고 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만약 가족에게 문제가 많아도 큰일이 닥치면 서로 상의를 하듯이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각 성도이기에 예수님의 교회에 합류하는 비용은 생각보다 큰 것입니다.
룻은 어머니 집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룻은 그의 백성과 조국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룻은 사람들이 자기를 어찌 생각할까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세상 사람을 어느 정도 멀리해야 하나님의 교회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미워하고 신자를 미워하는 자들을 어느 정도 멀리해야 룻과 같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에서 제자 됨의 비용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9장 51절에서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갈 결심을 굳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때, 거기서 자신을 내어 주러 가실 때, 자기 목숨을 헌신하기 위해 결심을 굳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치르신 대가가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룻기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압의 딸을 통해서 언약의 헌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만 궁극적으로 이 헌신을 완벽하게 보여 주는 사람은 룻이 아닙니다.
룻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앞으로 신약 시대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룻이 베들레헴으로 결코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가를 치르셨기에 룻도 모압의 딸에서 아브라함의 딸로 여겨졌습니다. 룻이 언약의 자녀요, 약속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에서는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신약 이후의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대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룻이 베들레헴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미래가 있고 큰 복 가운데 있다는 것을 잊어 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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