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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강해(講解) - 죽으면 죽으리이다

김영재박사

by 김경호 진실 2020. 12. 3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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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강해(講解) -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들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의 명한대로 다 행하니라

(에스더 415-17)

 

이스라엘이라는 국명(國名=나라의 이름)

야곱의 개명(改名-이름을 고침)된 이름입니다.

이는 창세기 3510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창세기 3511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생육하며 번성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창세기 128절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들을 낳았는데, 12명의 아들들로 하여금 생육하며 번성한 자들이 한 나라가 되었고,

그 나라의 이름인 국명(國名)이 바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새롭게 지어 주신 아름인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야곱을 통해 태어난 12명의 아들들로 하여금

생육하며 번성한 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초대왕은 사울이며,

그 뒤를 이은 두 번째 왕은 다윗이며,

세 번째 왕은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 이후로 이스라엘은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열왕기상 1133절로 34절의 말씀처럼

시돈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여

다윗과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기에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야곱의 12 아들로 이루어진

12 지파(支派-종파에서 갈라져 나온 파)였었는데,

앞서 살펴본 바와도 같이 솔로몬 왕 이후로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북쪽은 10지파로, 남쪽은 한 지파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남쪽의 한 지파는

바로 이스라엘의 4번째 아들인 유다지파인데,

이스라엘의 막내인 12번째 아들인 베냐민 지파가

유다 지파 속에 포함되어서 분리되었기에 두 지파가 되는 것입니다.

남쪽은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인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왕이 되어 다스리게 되었고,

북쪽은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증거로써 열왕기상 1129절로 32절 말씀에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가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상을 숭배하여 범죄한

이스라엘을 찢어서 나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범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의 국명(國名)은 에브라임인데,

이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11번째 아들인 요셉에게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두 명의 아들은 장자(張子 -맏아들)인 므낫세와

차자(次子-둘째 아들)인 에브라임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낳은 두 명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받게 하고자 할 때에

창세기 4813절의 말씀처럼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左手-왼 손)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右手-오른 손)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요셉이 의도(意圖-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 속의 생각이나 계획, 또는 무엇을 하려고 꾀함)와는 달리

창세기 4814절의 말씀처럼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게 되었습니다. 이는 14절 후반부의 말씀처럼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 맞겨 얹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장자인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 손을 향하게 하고,

차자인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 손을 향하게 하였지만

이스라엘은 그와는 반대로 손을 어긋 맞겨

장자인 므낫세에게는 왼 손으로,

차자인 에브라임에게는 오른 손으로 축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 결과로 인하여 장자인 므낫세는 차자의 축복을 벋게 되었고,

차자인 에브라임이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로 인하여 차자인 에브라임의 이름이 북쪽 이스라엘의 국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의 수도는 사마리아입니다.

또한 남쪽 이스라엘의 국명은 이스라엘의 4번째 아들인

유다의 이름을 따서 유대가 되었으며, 수도는 예루살렘입니다.

이렇듯 범죄로 말미암아 둘로 나누어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끊임없이 우상을 숭배하였으며,

북쪽 이스라엘인 에브라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이방인과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에브라임 백성들은

앗수르 왕에 의해 포로가 되어 메대로 잡혀가게 되었고,

그 메대가 바벨론에 의해 점령(占領- 다른 나라의 영토를 자기 나라의 군사적 지배하에 둠)당하자

바벨론 왕인 느부갓네살은 모르드개를 비롯한 유다인들을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移住-다른 곳이나 나라에 옮아가서 삶)시켰으며,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당한 유다인들은

다시 수산 땅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 궁에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가 왕이 된지 3년 만에 큰 잔치를 베풀고

모든 방백(方伯- 각 지방의 우두머리)들과 신복(臣僕)들을 그 잔치에 초청합니다. 그리고 6개월(180)간에 걸쳐

대연(大宴-큰 잔치)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의

위엄(威嚴-점잖고 엄숙함, 또는 그런 태도나 기세)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 180일 간의 행사를 마치고 그 행사에 참여했던 자들을 위해 다시 7일에 걸쳐 수산 궁에서 잔치를 베풀게 됩니다.

그 이유인즉 자신의 영토를 그들로 하여금

더 많이 확보(確保)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이 아하수에로 왕은 크세르크세스인데, 그는 인도부터 구스(Cush)까지 127개 도를 다스리는 페르시아 제국의 4번째 왕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수산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왕후인 와스디도 부녀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게 됩니다.

이 잔치의 마지막 날인 제 7일째에 아하수에로 왕은 포도주를 마시고, 기분이 좋아지게 되었고, 그만 정신을 잃어 버리게 되어,

자신의 아내인 왕후 와스디의 아름다움을 잔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아하수에로 왕은 바사와 메대의 일곱 방백인

가르스나와 세달과 아드마다와 다시스와

메레스와 마르스나와 므무간에게

와스디 왕후에게 관을 씌워 자기 앞에 나오게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 일은 왕후인 와스디의 인격(人格-사람으로서의 품격)

무시한 것이고, 아내에게 무례(無禮-예의에 벗어남)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는 아하수에로 왕이 자신의 왕후인 와스디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에 백성들과 귀족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하튼 왕은 술로 인해 만취(漫醉-술에 잔뜩 취함)된 상태에서

왕후인 와스디의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이려고 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관습(慣習-어느 일정한 사회 내부에서 오랫동안 지켜 내려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습관화 되어 온 규범이나 생활 방식)에 어긋난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유대인 출신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말하기를

와스디 왕후가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거절한

근본(根本-사물이 발생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당시에 남에게 자신의 아내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바사의 관습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아하수에로 왕은 왕후인 와스디에게 면류관만을 쓰고,

옷은 입지 않은 채로 나오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와스디 왕후는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일언지하(一言之下-한 마디로 잘라 말함)에 거절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유대인의 탈굼(타르굼)에 보면

와스디 왕후가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거절한 이유가

나체로 나오라는 왕의 요구 때문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람어로 타르굼은 번역또는 의미의 해석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 타르굼의 정의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후대(後代-뒤에 올 세대)에 아람어의 폭 넓은 사용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아람어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때부터 타르굼은 문자화 된 아람어 구약성경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타르굼은 구약성경을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을 설명한 일종의 해설 성경입니다.

이 타르굼은 당시에 자신들의 나라와 성전과 언어를 잃어버려

정체성(identity-사물 본래의 형체가 갖고 있는 성격, 존재의 본질 또는 이를 규명하는 성질)을 상실할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약성경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당시에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인

아람어로 옮겨 놓은 경전입니다.

신약 시대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아람어를 사용하셨는데,

이에 대해서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이자

근동 연구 학자 및 신약 연구 대학교 교수인

요아킴 예레마이스(Joachim Jeremias, 1900-1979)

자신의 저서(著書)

신약신학(New Testament Theology에서 말하기를

예수님의 모국어(母國語-자기 나라의 말)는 아람어였는데,

좀 더 분명(分明-틀림없이, 확실하게)하게 말한다면,

유대 아람어와는 약간 다른 갈릴리 지방에서 사용되던

서부 아람어(a Galilean version of Western Aramaic)“ 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람어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은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약성경은 전체적으로 헬라어로 기록되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예수님이 직접(直接-중간에 매개나 거리, 간격이 없이 바로 연결되는 관계)하신 말씀은 아람어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실례(實例-구체적인 실제의 본보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보아너게(3:17), 달리다굼(5:41), 아바(14:3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15:34), 게바(1:42), 등은 아람어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술로 인해 이성(理性-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

상실(喪失-잃어버림, 없어지거나 사라짐)하고,

이와 같은 부도덕(不道德-도덕에 어긋남)란 일을 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내시들은 와스디 왕후에게로 가서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전달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내시(內侍-내시부의 관원)들로 하여금 듣게 된 왕후인 와스디는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대로 하지 않고,

거절(拒絶-막고 끊다)하였으며

이에 아하수에로 왕은 몹시도 화가 나서

진노(震怒-존엄한 사람이 몹시 노함)하게 되었고,

그러한 왕의 마음은 불 붙는 것 같아서

분노(忿怒 - 분개하여 몹시 성을 냄, 또는 그렇게 내는 성)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법과 제도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래서 아하수에로 왕은 규례(規例-일정한 규칙과 정하여진 관례)와 법률(法律-사회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강제적인 규범)을 잘 아는 박사들을 불러서 이러한 사실을 말하고,

자신이 왕후(王后-왕비)인 와스디의 태도에 대해서

어떻게 처치(處置-일을 감당하여 치러 감)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에스더 116절에서 20절에

므무간이 왕과 방백 잎에서 대답하여 가로되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 할뿐 아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각 도 방백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하였나이다

아하수에로 왕이 명하여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도

오지 아니하였다 하는 왕후의 행위의 소문이 모든 부녀에게 전파되면

저희도 그 남편을 멸시할 것인즉

오늘이라도 바사와 메대의 귀부인들이 왕후의 행위를 듣고

왕의 모든 방백에게 그렇게 말하리니

멸시와 분노가 많이 일어나리이다

왕이 만일 선히 여기실찐대

와스디로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 중에 기록하여 변역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위를 저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왕의 조서가 이 광대한 전국에 반포되면 귀천을 무론하고

모든 부녀가 그 남편을 존경하리이다.“

라고 대답(對答-묻는 말에 답함)합니다.

그러자 이러한 므무간의 말을 에스더 121절의 말씀처럼

왕과 방백들이 그 말을 선히 여기게 되었고,

왕이 므무간의 말대로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에스더 122절의 말씀처럼

각 도 각 백성의 문자와 방언대로 모든 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남편으로 그 집을 주관하게 하고

자기 민족의 방언대로 말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아하수에로 왕은 그리스 정복에 나섰다가

크게 패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하여금 아하수에로 왕은 더욱 더 왕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자신이 조서를 내려 와스디 왕후를 자신 앞으로 오지 못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그리스 정복에 나선 이유는

자신의 아버지인 부왕(父王-아버지인 임금) 다리오가

B.C.(Before Christ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시기 전) 490년 당시에 월등(越等-수준이나 실력이 훨씬 뛰어남)

군사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Athens -그리스의 수도)의 마라톤 평원(平原 - 넓고 평평한 들판)의 전쟁에서 굴욕(屈辱 - 남에게 억눌리어 업신여김을 받음)적인

패배(敗北 - 싸움이나 겨루기에서 짐)를 맞보고

후퇴(後退 - 뒤로 물러남)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을 가리켜 마라톤 전쟁이라고 한 것은

마라톤 평원에서 전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마라톤 평원은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평원입니다.

당시에 마라톤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戰鬪 - 두 편의 군대가 무장하여 싸움)에 참여한 아테네 장병 만 명의 전체 병사들이

30Kg이 넘는 군장(軍裝 - 군인의 복장, 군대의 장비, 무장)

한 채로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약 40Km의 거리를 전속력(全速力 -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뛰어서

3시간 만에 주파(走破 - 정해진 거리를 쉬지 않고

끝까지 달림)하였습니다.

이들이 이러한 죽음의 질주(疾走 - 빨리 달림)를 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인즉슨

당시에 페르시아 군이 두 방향에서 공격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아테네 군은 1만 명인데 반해, 페르시아 군은 10만 명이었습니다.

아테네군 전력(戰力 - 전투나 경기 따위를 할 수 있는 능력)10배이던 페르시아군은 육군(陸軍 - 지상전을 주 임무로 하는 군대)

해군(海軍 - 바다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군대)으로

병력(兵力 - 군대의 인원, )을 둘로 나누어서

자신들의 육군이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 군을 붙들고 있는 사이에

자신들의 해군이 배를 타고 아테네 본진(本陣 - 총 지휘자 및 지휘 본부가 있는 군영)을 급습(急襲 - 갑자기 습격함)하는 양동작전(陽動作戰 - 자기편의 계획을 숨기고 적의 판단을 그르치게 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드러내어 적의 주의를 그 쪽으로 쏠리게 하는 작전)을 계획하여 진행한 것입니다.

이에 전군(全軍 - 전체의 군대)을 몰고 마라톤 평야로 나온

아테네 군은 어쩔 수 없이 양면작전(兩面作戰 - 전쟁에서, 두 방면에서 동시에 하는 작전)을 펼쳐야만 했습니다.

이에 아테네 군은 페르시아 함대(艦隊 - 군함 두 척 이상으로 편성된 해군 부대)가 아테네로 출발하기 전에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 육군을 밀어내고,

페르시아 함대도 궤멸(潰滅 - 무너지거나 흩어져 없어짐)해야만

하는 위기(危機 - 위험한 고비나 시기)에 봉착(逢着 - 어떤 처지나 상황에 부닥침)한 매우 어려운 전투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에 아테네 군은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 육군을 밀어내는 데

성공(成功 - 목적하는 바를 이룸)하였지만

그러는 사이에 페르시아 함대가 아테네로 출발해버렸습니다.

결국 아테네 장병(將兵 - 장교와 사병)들은 마라톤 평야에서

앞서 실펴 본 바와도 같이 전투를 마치자 마자 바로 30Kg이 넘는 군장(軍裝- 군인의 복장, 군대의 장비)을 한 채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약 40Km의 거리를 전속력(全速力 -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질주(疾走 - 빨리 달림)하여 3시간 만에 주파(走破 - 정해진 거리를 쉬지 않고 끝까지 달림)하였습니다.

이에 간발(間髮 - 순간적이거나 아주 적음을 나타내는 말)의 차이로 아테네군은 페르시아 함대보다 먼저 아테네에 도착하였고,

이로 인해서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 상륙작전(上陸作戰 - 해상으로 기동하여 적 해안에 기습 상륙하는 군사작전)을 포기하게 되었고,

아테네 군은 겨우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페르시아 군이 그대로 아테네에 상륙했다면

30Kg의 군장을 하고, 40Km의 거리를 달려와서

크게 지친 아테네 군은 승리를 장담(壯談 - 확신을 갖고 자신 있게 하는 말)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30Kg의 군장을 어깨에 메고 40Km의 거리를

3시간 만에 만 명이 뛰어서 이동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나라인 그리스를 지키기 위한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절실(切實 - 매우 시급하고 중요함)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眞正 - 거짓이 없이 참으로)

참 군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시사(時事 - 그 당시에 생긴 여러 가지 세상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세기 제국주의(帝國主義 - 우월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다른 나라나 민족을 정복하여 대국가를 건설하려는 침략주의적 경향) 시대에 이 마라톤 전투는 당시 시대의 필요성에

따라 미화(美化 - 아름답게 꾸밈)되기 시작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Plutarchus -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정치가 겸 작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그리스의 병사인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가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까지

40Km를 달려 와 기뻐하라 우리는 이겼노라

승전보(勝戰譜 - 전쟁에서 싸워 이긴 경과를 적은 기록)를 아테네 시민들에게 알리고, 절명(絶命 - 목숨이 끊어짐)하여

아테네의 영웅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대 올림픽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마라톤이란 경기가 근대 올림픽의 주 종목으로 채택된 것도

모두 마라톤을 미화하기 위한 작업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러한 미화작업을 통해서 알려진 내용은

B.C. 490년 페르시아 전쟁 당시 마라톤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뛰어갔다가

지쳐서 죽은 전령병(傳令兵 - 명령이나 문서 전달을 임무로 하는 병사)을 기념하는 경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實際 - 실지의 경우나 형편)로 이 전령병은

아테네를 향해서 달린 적도 없었고,

승리를 외치고 죽은 적도 없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도 같이 마라톤에서 아테네로 뛰어간

전령병의 이름은 페이디피데스인데,

사실 이 전령병은 승전보를 전하러 아테네로 간 게 아니라

구원병을 요청하러 스파르타로 2일에 걸쳐서

240Km를 달려갔지만 끝내 스파르타군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페이디피데스는 죽지도 않았으며, 마라톤 전투에서 승전하고, 멀쩡히 아테네로 개선(凱旋 -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옴)하였습니다.

참고로, 마라톤 거리는 당시에 마라톤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한 아테네 장병 만 명의 전체 병사들이

30Kg이 넘는 군장을 한 채로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40Km의 거리를 전속력으로 뛰어서 온 것에

근거(根據 - 근본이 되는 터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40Km의 거리가 40.2Km로도 알려져 있으며,

40.2Km42Km로 와전(訛傳 - 사실과 다르게 전함)되었습니다.

현재(現在 - 지금 이 시간)는 마라톤 거리가 42.195Km인데,

이는 1908년에 개최(開催 - 모임이나 행사 따위를 맡아 준비하여 엶)된 제 4회 런던 올림픽에서 부터입니다.

처음에는 출발지점을 주경기장으로 정해서

42Km를 달리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호기심(好奇心 -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많은 영국 황실의 사람들이 마라톤 출발 모습을 보고 싶다.

출발선을 윈저궁 황실 육아실의 창 아래로 옮겨 달라

요청(要請 - 필요한 일을 해 달라고 부탁함)하는 바람에

195m가 더 늘어나게 되었고,

그 때 이후부터 마라톤의 총 길이가 42.195m로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1924년 파리 올림픽 때에 “1908년 런던 올림픽 때를 기준으로 하자.” 는 의견이 채택(採擇 - 작품, 의견, 제도 따위를 골라서 다루거나 뽑아서 씀)되어 현재의 42.195Km로 확정(確定 - 틀림없이 정함)된 것입니다.

그 이유인즉슨 단시에 영국은 모든 분야(分野 - 여러 갈래로 나눈 각각의 범위)에서 영향력(影響力 - 영향을 미치는 힘)이 가장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수도인 런던에서 열린 올림픽의 마라톤

거리가 기준이 된 것입니다.

이렇듯 마라톤 평야에서 패전(敗戰 - 전쟁에서 짐)한 다리오 왕은 다시금 아테네 전쟁을 준비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인 아하수에로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登極-임금의 지위에 오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른 아하수에로는 부왕의 숙원(宿怨-오래 묵은 원한)

그리스 전쟁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하수에로 왕은 B.C 481년에 그리스 전쟁을 단행하였지만

살라마스 해전과 폴라타이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2년 뒤인 B.C 479년에 다시금 그리스 전쟁에 나서지만

이때도 역시나 패배(敗北)를 당함으로

아하수에로 왕의 그리스 전쟁은 사실상 실패(失敗 - 일을 잘못해서 뜻대로 되지 않거나 그르침)로 마무리가 됩니다.

에스더 21절에 기록된 그 후에라는 말씀은

이 모든 전쟁이 끝난 이 후에 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도 같이 이러한 일로 하여금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 21절의 말씀처럼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의 노가 그치매 와스디와 그의 행한 일과

그에 대하여 내린 조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가까이에서 지켜 본 시신(侍臣-왕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아뢰되

에스더 22절의 말씀과도 같이

왕은 왕을 위하여 아리따운 처녀들을 구하게 하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에스더 23절에서 4절의 말씀과도 같이

전국 각 도에 관리를 명령하여 아리따운 처녀를

다 도성 수산으로 모아 후궁으로 들여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손에 붙여

그 몸을 정결케 하는 물품을 주게 하시고

왕의 눈에 아름다운 처녀로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를 삼으소서

라고 말합니다.

이에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 24절 후반부의 말씀처럼

그 말을 선히 여겨 그대로 행하게 됩니다.

이 때에 모르드개라는 유다인이 수산 도성에 있게 되었는데,

그는 베냐민 지파이며, 에스더 26절의 말씀처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함께 사로 잡혀 포로가 된 자입니다.

이 모르드개에게는 에스더 27절의 말씀처럼 저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가 있었는데,

이 에스더는 부모가 없고 용모가 곱고 아름다운 처녀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였습니다.

하닷사(Hadassah)는 본래 히브리식 이름으로서

상록 관목수이며, 화석류나무인 도금양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나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에스더의 히브리 본명(本名-본 이름, 실명)입니다.

이 도금양(桃金孃)은 늘푸른 떨기나무입니다.

또한 에스더(Esther)는 바사, 즉 페르시아식 이름으로서

‘, ”소녀라는 뜻입니다.

에스더 28절의 말씀처럼 왕의 조명이 반포되매 처녀들이

도성 수산에 많이모이게 되었고,

헤게의 수하에 나아갈 때에 에스더도 왕궁으로 이끌려 가서

궁녀를 주관하는 헤게의 수하에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에스더 29절의 말씀처럼

헤게가 이 처녀를 기뻐하여 은혜를 베풀어 몸을 정결케 할 물품과 일용품을 곧 주며 또 왕궁에서 의례히 주는 일곱 궁녀를 주고 에스더와 그 궁녀들을 후궁 아름다운 처소로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말처럼 에스더 210절의 말씀처럼 자기의 민족과 종족을 고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모르드개는 과거에는 에스더의 사촌 오빠였지만,

지금은 에스더의 아빠입니다.

왜냐하면 에스더 27절 후반부의 말씀처럼

그 부모가 죽은 후에 자기 딸 같이 양육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 211절의 말씀처럼 날마다 후궁 뜰 앞으로 왕래하며 에스더의 안부와 어떻게 될 것을 알고자합니다.

이제 처녀들은 자신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열두 달의 기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 열두 달의 기간 동안에 에스더 212절의 말씀처럼

여섯 달은 몰약 기름을 쓰고 여섯 달은 향품과 여자에게 쓰는

다른 물품을 써서 몸을 정결케합니다.

그리고 처녀들은 자신들을 정결케 하기 위한 열두 달의 기간을 보내고 자신의 차례가 되면 왕과 동침하기 위해서 왕에게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제 에스더의 차례가 되어서 에스더는 에스더 216절의 말씀처럼 아하수에로 왕의 칠년 시월 곧 데벳월에 에스더가 이끌려 왕궁에 들어가서 왕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자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 217절의 말씀처럼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이에 에스더가 모든 처녀보다 왕의 앞에 더욱 은총을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를 삼게 됩니다.

이에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게 되었고,

각 도의 세금을 면제(免除-책임이나 의무를 지우지 아니함)해 주고, 왕의 풍부함을 따라 크게 상을 주는 일로 기쁨을 나누게 됩니다.

이제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오르자 모르드개는 늘 대궐 문에 앉아 그곳을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는 중에 에스더 221절의 말씀처럼 문 지킨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을 원한하여 모살하려는 계획을 듣고,

이 사실을 왕후인 에스더에게 고하자

에스더는 이를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하게 됩니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의 앞에서 궁중일기에 기록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로 하여금 모르드개의 이름이 궁중일기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포로(捕虜 - 전쟁에서 사로잡힌 적군)의 신분으로 끌려 온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이방 땅에서 명성(名聲-세상에 널리 떨친 이름, 세상에 알려진 좋은 평판)

얻게 되었고,

그 명성으로 하여금 함께 포로 되어 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입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異邦人 - 다른 나라 사람)의 신분으로,

포로(捕虜 - 전쟁에서 사로잡힌 적군)의 신분으로

왕후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과

궁중일기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다면

불가능(不可能 - 가능하지 않음)한 일입니다.

이들은 신앙의 절개(節槪 - 신념이나 신의 따위를 굽히지 않고 지키는 굳건한 마음이나 태도)를 이방 땅에서도 굳건히 지켰으며,

주위의 환경과 자신들의 신분을 보고 낙심(落心 - 바라던 일을 이루지 못하여 마음이 상함)하지 않고,

그러는 와중(渦中 - 물이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가운데, 일 따위가 시끄럽고 어지럽게 벌어진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향한 믿음을 굳게 지킨 결과로 인해서

에스더는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모르드개의 이름은 궁중일기에 기록되게 됩니다.

요셉도 형제들에 의해서 천한 종의 신분으로 팔려 갔지만

믿음의 절개를 끝까지 지켰기에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다니엘 또한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그의 변함없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바벨론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오른 것은 유다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仁慈 - 어질고 사랑이 깊다)하심과 긍휼(矜恤 - 불쌍히 여김, 가엾게 여겨 돌보아 줌)하심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9절에서 31절의 말씀을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시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비유(比喩 -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다른 현상이나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일)적인 말씀으로서

그 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세밀(細密 - 자세하고 빈틈없이 꼼꼼하다)하시다는 말씀이며, 선택하신 지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갓을 강조(强調 - 어떤 부분을 특히 강하게 주장하거나 두드러지게 함)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새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으면 결단코 이루어질 수가 없으며,

선택하신 자들의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全知 - 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지혜)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결단코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비록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그들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배후(背後 - 등 뒤 또는 뒤쪽)

항상 계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키시되 시편 178절 말씀에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한 것처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어서 9절의 말씀처럼 압제하는 악인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골리앗 앞에서의 담대(膽大 - 배짱이 두둑하고 용감하다)함은 다윗이 자신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확실히 믿고 의지(依支- 마음을 기대어 도움을 받음 또는 그 대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강하며, 그 분의 능력(能力 - 일을 감당해 내는 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 죄악으로 가득 찬 암울(暗鬱 - 암담하고 침울함)

세상 속에서 우리가 아름다운 삶을

영위(營爲 - 일을 꾸려 나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르드개의 일이 있은 후에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 31절의 말씀처럼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地位 - 신분에 따르는 어떤 자리나 계급)를 높이 올려 모든 함께 있는 대신 위에두게 되었고,

에스더 32절의 말씀처럼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복이 다 왕의 명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이처럼 참으로 결단(決斷 - 딱 잘라 결정허여 단정을 내림)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모르드개는 주저(躊躇 - 머뭇거리며 망설임)하지 않고 하나님께 향한 신앙의 절개를 꿋꿋이 지키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과 환난(患難 - 근심과 재난)과 핍박(逼迫 - 형세가 매우 절박하도록 바싹 닥쳐 옴)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라는 시편 5015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시편 182절의 말씀처럼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무릎 꿇지 않자 에스더 33절의 말씀처럼

대궐 문에 앉은 왕의 신복이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에스더 34절 말씀처럼 이에 대해서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고하였더니 저희는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고하게 됩니다.

당시에 페르시아는 유일신(唯一神 -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경계(警戒 - 뜻 밖의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고 살핌)하며, 멀리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왕궁으로 보내면서

유다 민족임을 말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말했던 모르드개가 자신이

유다민족임을 떳떳이 말하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풍전등화(風前燈火 - 바람 앞에 놓인 등불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가리키는 말)와 같은 상황 속에서

모르드개가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담대함을 나타내는 말이며,

이러한 말을 담대하게 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모르드개의 변함없는 굳은 절개를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신앙의 선진(先進 - 어떤 한 분야에서 연령, 지위, 기량 등이 앞섬, 또는 그런 사람)들은 죽음의 고통 앞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러한 모르드개의 일이 하만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또한 모르드개가 유다인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이에 격분(激憤 - 몹시 분개함)한 하만은

에스더 36절의 말씀처럼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경하다 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하였습니다.

이처럼 모르드개의 한마디 말로 하여금 유다인 전체가 죽음의 위협(威脅 - 힘으로 으르고 협박함)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족(家族 - 부부를 중심으로 한 집안을 이루는 사람들)중에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인해서

핍박을 받게 된 가족들이 우리들의 신앙의 선진들 가운데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신앙의 굳은 절개를 지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의 온 구성원(構成員 - 어떤 조직이나 단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들이 어려운 고초(苦楚 - 고난)를 겪은

우리들의 신앙의 선진들이 있었기에 우리들이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신앙의 절개를 굳게 지켜서 우리들의 후손(後孫- 몇 대가 지난 뒤의 자손)들에게 신앙의 유산(遺産 - 선조가 남긴 가치 있는 물질적, 정신적 전통)을 남겨 주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버리기까지 지킨 그들의 신앙이 결코 헛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029절에서 30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에게 에스더 39절의 말씀처럼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저희를 진멸하소서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붙여 왕의 부고에 드리리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유다인들을 다 진멸(殄滅 - 무찔러 모조리 죽여 없애 버림)하도록 조서를 내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에 상응(相應 - 서로 응하거나 어울림)하는 대가(對價 - 자신의 재산이나 노력 따위를 다른 사람에게 이용하게 하고 그 보수로서 얻는 재산상의 이익)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부고에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고(府庫)란 문서나 재물을 넣어 곳간으로

지은 집을 의미합니다.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에게 은 일만 달란트를 바치고자 했는데,

이 은 일만 달란트는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1달란트를 드라크마로 환산하면 6,000드라크마입니다.

그리고 1드라크마는 노동자의 1일 품삯입니다.

다시 말하면, 1달란트는 노동자의 6,000일의 품삯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은 일만 달란트란 사람이 상상할 수도 없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만의 이러한 말에 에스더 310절의 말씀처럼

왕이 반지를 손에서 빼어 유다인의 대적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11절의 말씀에 이르되 그 은을 네게 주고

그 백성도 그리하노니 너는 너의 소견에 좋을대로 행하라 하더라

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기록된 은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바치기로 했던 은이 아니라 하만이 유다인들에게 탈취할 재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바치기로 했던 은 일만 달란트는

하만이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것이기에

유다인들의 재산을 탈취해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에게 유다인들의 대학살에 관한 전권(全權 - 맡겨진 어떤 일을 책임지고 처리하는 일체의 권리)을 허락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반지를 빼어 하만에게 준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더 312절 말씀에

정월 십 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어 하만의 명을 따라

왕의 대신과 각 도 방백과 각 민족의 관원에게

아하수에로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쓰되

곧 각 도의 문자와 각 민족의 방언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조서를 역졸들에게 부쳐 왕의 각 도에 보내게 되었는데,

그 조서(詔書 - 임금의 뜻을 일반인들에게 알리고자 적은 문서)의 주된 내용은 에스더 313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십이월 곧 아달월 십 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노소나 어린아이나 부녀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리라.” 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기록된 유다인들의 대학살 날짜인 1213일은

에스더 37절 말씀처럼 아하수에로 왕 십 이년 정월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십이월 곧 아달월을 얻게된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백성들인 유다인 전 민족의 목숨이 이방사람들이 뽑은 제비에 달려 있게 된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에게서 뇌물(賂物 - 공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특별한 편의 제공의 대가로 주는 부정한 돈이나 물건)을 받고

하만이 요구한 대로 유다인들의 학살을 허락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확실하고도 분명한 의미로 아하수에로 왕은 반지를 자신의 손에서 빼어 하만에게 주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이제 유다인들의 목숨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만의 손아귀에 들어가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 최후의 날(Doomsday)

1213일로 정해지고야 말았습니다.

잠언 1723절 말씀에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의 뇌물에 그만 눈이 멀어 유다인들의 모든 것을 하만에게 떠 넘기고야 말았으며,

유다민족의 대학살이라는 살인(殺人 - 사람을 죽임)을 방조(傍助 - 옆에서 도와 줌)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다민족의 대학살에 관한 조서가 에스더 315절의 말씀처럼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권력으로 한 민족을 대량학살(大量虐殺 - 어떤 인종, 종교, 정치, 민족집단을 고의적, 조직적으로 말살하는 것)하도록 명을 내려 놓고도 태연(泰然 - 태도나 기색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예사로움)하게 술에 취해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에스더 41절의 말씀처럼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으며 재를 무릅쓰고 성 중에 나가서 대성통곡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모르드개는 대궐문 앞까지 갔다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에스더 42절의 말씀처럼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를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식을 듣게 된 유다인들은

에스더 43절의 말씀처럼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였습니다.

이는 유다인들이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아주 잘 알기에

어찌할 방도(方途 - 어떤 일을 해 나갈 방법)가 없었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사정을 아뢰고

간구(懇求 - 간절히 바람)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 어느 인생도 결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도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들은 모두 다 창조주(創造主 -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 하나님으로부터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被造物 -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물건)

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타락(墮落 -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나쁜 길로 빠짐)한 인생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후서 517절의 말씀처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인하여 죄에서 정결(淨潔 - 매우 깨끗하고 깔끔함)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부패(腐敗 - 부패균에 의해 단백질 및 유기물이 유독한 물질과 악취를 발생하게 되는 변화)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보혈을 흘리시게 하시어

그 보혈로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시고,

그 결과로 인하여 이전의 죄악은 다 지나가게 하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In Christ)에서 새로운 피조물(New Creature)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자신의 아비인 모르드개가 대궐 문 앞에서 굵은 베를 입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자신의 시녀와 내시를 통해 모르드개가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에스더 44절의 후반부의 말씀처럼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를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아니하게 됩니다.

그러자 에스더는 에스더 45절의 말씀처럼 에스더가 왕의 명으로 자기에게 근시하는 내시 하닥을 불러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가서 이것이 무슨 일이며 무슨 연고인가 알아보라.” 고 명합니다.

이에 하닥은 에스더 46절의 말씀처럼 대궐 문 앞 성중 광장에 있는 모르드개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보낸 내시인 하닥에게 말하기를

에스더 47절에서 8절 말씀에

모르드개가 자기의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왕의 부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수효를 하닥에게 말하고,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는 말을 에스더에게 전하라고 말합니다.

에스더는 내시인 하닥을 통해 모르드개의 말을 듣게 되었고,

그 말 가운데 자신의 민족인 유다인들의 대량학살(大量虐殺)에 관한 충격(衝擊 - 사람의 마음에 심한 자극으로 흥분을 일으키는 일)적인 말을 듣게 됩니다.

이러한 모르드개의 말에 에스더는 내시인 하닥에게

에스더 410절의 말씀처럼

너는 모르드개에게 가서 고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에스더 411절 말씀에 그 내용에 관해서 말하기를

왕의 신복과 왕의 각 도 백성이 다 알거니와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지가

이미 삼십일이라 하라.“ 고 전하라고 합니다.

이 말인즉슨 에스더는 한 마디로 왕에게 나아갈 수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왕비라고 할지라도 왕의 부르심이 있어야만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왕을 지키는 시위대(侍衛隊 - 왕의 호위부대) 가 왕의 부르심이 없이 왕에게 근접(近接 - 가까이 다가가거나 닿음)한 자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왕을 해하려고 하는 것으로 간주(看做 - 상태나 모양이나 성질 따위가 그렇다고 여김)하고

제거(除去 - 덜어 없앰)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정(事情 - 일의 형편이나 까닭)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에스더에게 있어서 모르드개의 요청(要請 - 필요한 일을 해 달라고 부탁함)은 너무나도 힘겨운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부탁을 거절하게 되었는데,

이에 모르드개는 내시인 하닥을 시켜 에스더에게 말하기를

에스더 413절의 말씀처럼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고 하면서 왕후인 에스더도 역시 유다인임을 상기(想起 - 지난 일을 다시 생각하여 냄)시키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에스더 414절의 말씀처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르드개의 유다민족을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호소(呼訴 - 억울하거나 딱한 사정을 남에게 하소연함)와 권면(勸勉 - 알아듣도록 권하고 격려하여 힘쓰게 함)을 듣게 된

에스더는 왕 앞에 나아갈 것을 담대하게 말합니다.

이러한 에스더의 왕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는

단순함을 훨씬 뛰어 넘어 자신의 생명을 송두리째 버리고자 함입니다.

에스더 415절 말씀에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이어서 16절에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들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에스더의 왕 앞으로 나아감 속에는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는 굳건하고도 숭고(崇高 - 존엄하고 거록하다)한 신앙의 절개(節槪 - 신념, 신의 따위를 굽히지 않고 지키는 굳건한 마음이나 태도)와 순교(殉敎 - 자기가 믿는 신을 위하여 목숨을 바침)의 각오(覺悟 - 앞으로 닥쳐 올 일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만의 조서가 발표된 이후에

이미 금식(禁食 - 치료나 종교적인 이유 등으로 일정 기간 음식을 먹지 않음)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다시금 모르드개를 통하여 모든 유다인들을 다 모으고 자신을 위하여 금식할 것을

요청(要請 - 필요한 일을 해달라고 부탁함)합니다.

에스더가 부탁한 이 금식은 슬픔이나 애통(哀痛 - 몹시 슬퍼함)함을 나타내는 금식이 아니라 에스더 자신의 결단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에스더는 416절에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에스더가 말한 밤낮 삼일의 금식 기간은 상당히

혹독(酷毒 - 정도가 몹시 심하다)한 것입니다.

이는 에스더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매우 중대(重大 - 매우 중요하고 가볍게 여길수 없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더 또한 함께 금식하였는데, 이는 금식을 통해 에스더의 모습이 초췌(憔悴 - 고생이나 병 따위로 수척하다)해지면

왕이 에스더에게 금홀(Golden Scepter 금으로 된 왕의 지팡이를 말하며, 절대권위와 통치권의 상징물)을 내밀 가망성이

희박(稀薄 - 매우 적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왕 앞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왕의 부르심이 없을 때에는 왕비라고 할지라도 왕 앞으로

결코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왕이 금홀을 내밀어 주어야만 생명을 겨우 부지(扶持 - 매우 어렵게 보존하거나 버티어 나감)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스더의 왕 앞으로 나아감 속에는

자신의 민족인 유다인들이 하만의 계략(計略 - 꾀나 수단)에 의하여 몰살(沒殺 - 죄다 죽임)당할 위기(危機 - 위험한 고비나 시기)를 모면(謀免 - 어떤 일이나 책임을 꾀를 써서 벗어남)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 일을 할 수 있는 유일(唯一 - 오직 그것 하나뿐임)한 사람이 에스더 자신뿐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사화복(生死禍福 - 삶과 죽음과 화와 복)의 주관자(主管者 - 어떤 일을 책임지고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가 내포(內包 - 어떠한 속성이나 뜻을 속에 지님)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식이란 능력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금식은 금식하는 자가 강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약해지는 것입니다.

이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고백은

창세기 4314절의 말씀 후반부에 기록된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라는 말씀을 연상(聯想 -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을 불러 일으키는 작용)시킵니다.

이 말씀은 애굽에서 총리가 된 요셉 앞에 기근으로 인하여 식량을 구하러 온 요셉을 팔았던 형제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을 때

요셉을 그들에게 그들의 아우이자

자신의 유일한 아우인 베냐민의 안부에 대해서 묻고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아니하면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요셉과 베냐민은 라헬이 낳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야곱의 12아들 중에서 어머니가 같은 유일한 형제입니다.

또한 야곱은 4명의 아내들 중에서 라헬을 지극히 사랑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 요셉과 베냐민을 지극히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이제 요셉을 잃게 된 야곱은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베냐만을

도저히 잃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근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베냐민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 라고 하며 베냐민을 형제들에 손에 떠 맡기게 됩니다.

에스더도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입니다.

야곱이 말했던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는 말씀과

에스더가 말했던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는 말씀은

많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고통과 위협(威脅 - 힘으로 으르고 협박함)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그 모든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굳은 다짐을 볼수 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도 같이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각오로,

아니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버리면서까지

유다 민족의 구원을 위해 왕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이제 에스더 51절에서 2절의 말씀처럼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 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보좌에 앉았다가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만지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벌게이트(Vulgate) 역에서는 에스더가 금홀 끝에 키스를 했다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의미상에서는 큰 차이점이 없습니다.

이 벌게이트 역은 제롬이 5세기 초(405년 완료)에 발간한

라틴어 번역 성경입니다. 이는 성경 전체를 당시에 국제 공용어였던 라틴어로 옮긴 성경역본입니다.

이 벌게이트 역은 어려운 용어 대신에 쉬운 용어를 사용했기에 당시에는 사람들이 이 번역본을 싫어 했습니다.

그래서 Vulgate(벌게이트)는 라틴어로서 통속적인, 천박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3절 말씀에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라고 말합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인 에스더를 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무릎쓰고 에스더가 왕 앞으로 나아간 것은

유다인들의 대학살이라는 긴박(緊迫 - 몹시 다급하고 절박함)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하수에로 왕은 이를 잘 알기에 왕후인 에스더에게

금홀을 내어밀게 되었고,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온 유다인들의 금식과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죽음을 각오한 변함없는 신앙의 절개로 말미암아

이방 땅에서 아름답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1414절의 말씀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려운 난관(難關 - 일을 해 나가기 어려운 고비)속에서도

절망(絶望 - 희망이 없어져 체념하고 포기함)하지 않고,

절망(切望 - 간절히 바람)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선한 팔로 붙드시고,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에스더는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라는 아하수에로 왕의 말에 에스더 54절 말씀과도 같이

에스더가 가로되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임하소서

라고 간청(懇請 - 간절히 청함)합니다.

이러한 에스더의 간청어린 말에 왕은 에스더 55절의 말씀처럼

왕이 가로되 에스더의 말한대로 하도록 하만을 급히 부르라 하고

이에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의 베푼 잔치에 나아가게 됩니다.

하만은 왕의 다급(多急 - 일이 바싹 닥쳐서 매우 급하다)한 부르심에 아무런 영문(일이 진행되는 까닭이나 형편)도 모른 채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 56절의 말씀처럼

잔치의 술을 마실 때에 왕이 에스더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 할찌라도 시행하겠노라

고 말합니다.

이 말에 에스더는 57절의 말씀처럼

에스더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소청, 나의 요구가 이러하니이다라고 대답하며,

이어서 8절 말씀에 에스더는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고, 왕이 내 소청을 허락하시며 내 요구를 시행하시기를 선히 여기시거든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나아오소서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에스더는 왕과 하만을 잔치에 불러 놓고

자신의 간청을 내일로 미루게 됩니다.

에스더가 자신의 절박(切迫 - 매우 다급하고 절실하다)한 간청을 미룬 것은 결코 소심(小心 - 작음 마음)해서가 아니라

금식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얻게 된 특별한 지혜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왕이 확실하게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게 하기 위해서

시간을 내일로 유예(猶豫 - 시일을 미루거나 늦춤)한 것입니다.

에스더는 사전(事前 - 일을 시작하기 전)에 철저(徹底 - 속속들이 꿰뚫어 밑바닥까지 투철함)하게 준비된 계획과 방법에 따라서

왕에 대한 자신의 요청을 뒤로 미루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에스더가 이렇게 함으로 인해 에스더에 대한 왕의 애착(愛着 - 사랑하고 아껴서 단념할 수 없음)은 더욱 더 깊어지게 되는 것이며, 이에 유다인의 운명과 하만의 운명이 극적으로 뒤바뀌는 반전(反轉 - 일의 형세가 뒤바뀜)되는 계기(契機 -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원인이나 기회)가 마련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더 59절의 말씀처럼

이 날에 하만이 마음이 기뻐 즐거이 나오더니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어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을 보고 심히 노하게 됩니다.

이어서 하만은 에스더 510절의 말씀처럼

참고 집에 돌아와서 사람을 보내어 그 친구들과 그 아내 세레스를 청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산을 과시(誇示 - 자랑해 보임)합니다.

그 과시의 내용은 에스더 511절에서 12절의 말씀처럼

자기의 부성한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방백이나 신복들보다 높인 것을 다 말하고

또 가로되 왕후 에스더가 그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 받은 자는 나 밖에 없었고

내일도 왕과 함께 청함을 받았느니라.“ 고 합니다.

이는 참으로 무지몽매(無知蒙昧 - 지식이 없고 사리에 어두움)한 말이며, 이러한 일들의 근본적인 취지(趣旨 - 어떤 일의 근본이 되는 목적이나 긴요한 뜻)를 전혀 파악(把握 - 어떤 대상의 내용이나 본질을 확실히 이해함)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만은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유다인들의 대학살이 반전되어

오히려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豫想 - 일을 직접 당하기 전에 미리 생각해 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만은 모르드개가 대궐문에 앉아 있어 자신을 보고도 미동(微動 - 아주 조금 움직임)도 하지 아니함을 보고

심히 노하여 모르드개와 유다인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자신의 친구들과 아내인 세레스에게 묻게 되자

그들이 에스더 514절에 말하기를

그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가 이르되 오십 규빗이나 높은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나아가소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에 하만이 그 말을 선히 여기고 명하여 나무를 세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오십 규빗(Cubit)은 약 23m나 되는 높이입니다.

이렇게 높은 곳에 모르드개를 매달아 그가 비참(悲慘 - 더 할수 없이 슬프고 끔찍함)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경각심(警覺心 - 정신을 차리고 조심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에스더 61절의 말씀처럼 아하수에로 왕은 잠이 오지 않아서

명하여 역대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2절 말씀에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는 내용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듣게 된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 63절 말씀처럼 왕이 가로되 이 일을 인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고 묻게 됩니다.

그러자 이어서 시신이 대답하되 아무 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이에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 64절 말씀처럼

왕이 가로되 누가 뜰에 있느냐고 묻게 되었고,

마침 하만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모르드개 달기를

왕께 구하고자 하여 왕궁 바깥 뜰에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왕의 물음에 에스더 65절의 말씀처럼

시신이 고하되 하만이 뜰에 섰나이다라고 대답 하자

이어서 왕이 가로되 들어오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에스더 66절의 말씀처럼 하만이 들어오거늘 왕이 묻되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뇨라고 묻자

하만은 심중에 이르되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자는

나 외에 누구리요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왕이 모르드개를 두고 한 말인데,

하만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자기를 두고 한 말로

착각(錯覺 -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느끼거나 생각함)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만이 자기모순(自己矛盾 -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빠진 것입니다.

하만은 이러한 아하수에로 왕의 물음에 답하기를

에스더 67절에서 9절 말씀처럼

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시려면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 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하만의 말을 듣게 된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 610절의 말씀처럼 이에 왕이 하만에게 이르되

너는 네 말대로 속히 왕복과 말을 취하여 대궐 문에 앉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에게 행하되

무릇 네가 말한 것에서 조금도 빠짐이 없이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에 하만은 에스더 611절의 말씀처럼

하만이 왕복과 말을 취하여 모르드개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되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역사적인 대반전((反轉 - 일의 형세가 크게 뒤바뀜)이 일어난 중차대(重且大 - 매우 크고 중요하다)한 사건이며,

하만이 모르드개에게 죄수복을 입혀 나무에 매달아 비참하게

죽이려 했지만, 오히려 하만이 그러한 모르드개에게 죄수복이 아닌 왕복을 입히고 성중 거리를 다니며 자신이 아닌 모르드개가 왕을 존귀케 하는 자임을 반포하게 되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아 모든 사람들에게 모욕(侮辱- 깔보고 욕되게 함)감을 주고자 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그러한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고

말을 태워 성중 거리로 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모르드개를 선전(宣傳 - 어떤 것의 존재나 효능 또는 주의나 주장들을 남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일, 또는 그 운동과 활동)하게 되어 자신이 굴욕(屈辱 - 남에게 억눌리어 업신여김을 당함)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배후(背後- 등 뒤 또는 뒤쪽)에는 아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돌보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신뢰하였기에 죽음도 불사(不辭 - 사양하지 않음, 마다하지 않음)한 것입니다.

이제 에스더 71절의 말씀처럼

왕이 하만과 함게 또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하수에로 왕은 그 잔치에서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보기를 에스더 72절의 말씀처럼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찌라도 시행하겠노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아하수에로 왕의 말에

에스더 73절의 말씀처럼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에스더 74절 말씀에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에스더의 말을 듣게 된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 75절의 말씀처럼 왕후 에스더에게 일러 가로되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뇨라고 묻게 됩니다. 이에 에스더 76절 말씀처럼 에스더가 가로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어서 이러한 에스더의 말에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 77절의 말씀처럼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어서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는 왕이 자기에게 화를 내리기로 결심한 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에스더 78절의 말씀처럼

왕이 후원으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오니

하만이 에스더의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왕이 가로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려고 하는가

이 말이 왕의 입에서 나오매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게 되었습니다.

왕후 에스더로 하여금 하만의 악한 계략(計略 - 꾀나 수단)을 듣게 된

아하수에로 왕은 너무나도 분노(憤怒 - 분개하여 몹시 냐는 성)한 나머지 잔치 자리를 떠나 후원(後苑 - 대궐 안에 있는 정원)으로 들어갔지만 그 분노를 억제(抑制 - 감정이나 욕망, 충동적인 행동 따위를 억눌러 그치게 함)하지 못한 채

다시 잔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만의 엎드린 모습을 보고 왕후인 에스더를 강간하려고 하느냐며 분노를 표출(表出 - 겉으로 나타냄)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아하수에로 왕의 말에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게 되었습니다.

고대 중근동 국가들에서는 왕의 왕후에 대한 타인(他人 - 다른 사람)의 접근(接近 - 가까이 다가감)을 엄격히 금지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하수에로 왕이 하만에게 왕후인 에스더를 강간하려고 하는가라고 말한 것은 사형(死刑 - 범죄인의 목숨을 끊음)선고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얼굴을 싼다는 것은 사형을 의미하는 것이며,

죄인의 얼굴을 싸고 가리는 행위는 정죄 받은 죄인은 더 이상

빛을 볼 자격이 없다는 의미로서 고대 국가들에게서 이루어졌던 보편적(普遍的 - 두루 널리 미치거나 해당되는 것)

관행(慣行 - 사회에서 예전부터 해 오던 대로 함)이었던 것입니다.

에스더 79절 말씀에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고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라고 충언(忠言 - 충직하고 바른 말을 함)을 드리자

이에 왕이 가로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어서 10절에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이에 왕의 노가 그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만은 모르드개를 달고자 했던 나무가 지신이 달리고 마는 참담(慘憺 - 참혹하고 암담함)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하만이 달리게 된 나무는 바로 하만이 모르드개를 비롯하여 온 유다인들을 달고자 했던 나무입니다.

이렇듯 하만은 자신의 계략(計略)에 자신이 넘어졌고,

자신이 파놓은 함정(陷穽 - 짐승 따위를 잡기 위하여 파놓은 구덩이)

자신이 빠지고야 마는 어리석은 자기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權力 - 남을 지배하여 복종시키는 힘, 특히 국가나 정부가 국민에게 행사하는 강제력)

남용(濫用 - 함부로 사용함)한 결과로 인해

처절(凄切 - 몹시 슬프고 쓸쓸함)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의 새끼줄로 자신의 목을 맨다는 것입니다.

곧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괴로움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반면(半面 - 양쪽 면의 한 쪽)에 모르드개를 비롯한

포로된 유다인들은 비록 연약하고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권능(權能 - 권세와 능력)으로 인해

죽음의 고통(苦痛 -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예나 지금이나

결코 외면(外面 - 상대한 사람과 마주 대하기를 꺼리어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려 버림)하지 아니하시고

한결같은 은혜와 사랑으로 돌보시고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 81절의 말씀처럼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집을 왕후 에스더에게주었고

에스더가 모르드개는 자기에게 어떻게 관계됨을 왕께 고한 고로 모르드개가 왕의 앞에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에스더 82절의 말씀처럼

왕이 하만에게 거둔 반지를 빼어 모르드개에게주었으며,

에스더가 모르드개로 하만의 집을 주관하게하였습니다.

이는 하만에게 주어졌던 모든 권세(權勢 - 권력과 세력)가 모르드개에게로 이양(移讓 - 남에게 넘겨 줌)된 것이며,

모르드개가 하만이 소유했던 모든 것들을 거머쥐게(휘감아 움켜 쥐다)

된 것입니다. 이제 하만도 죽었고, 하만의 모든 소유(所有 - 가지고 있는 물건)도 모르드개가 차지(次知 - 사물이나 공간, 지위 따위를 자기 몫으로 가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남아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만이 유다인들을 멸하려고 꾀하고 쓴 조서입니다.

에스더는 이 조서를 취소해 달라는 간청을 드리고자 다시금

에스더 83절의 말씀처럼 왕의 앞에서 말씀하며 왕의 발 아래 엎드려 아각 사람 하만이 유다인을 해하려 한 악한 꾀를 제하기를 울며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에스더 84절의 말씀처럼 왕이 에스더를 향하여 금홀을 내어밀었고, 이에 에스더가 일어나 왕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또 다시 금홀을 잡고 아하수에로 왕의 앞에

서게 된 에스더는 85절의 말씀처럼

가로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며 내가 왕의 목전에 은혜를 입었고

또 왕이 이 일을 선히 여기시며 나를 기쁘게 보실찐대

조서를 내리사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이

왕의 각 도에 있는 유다인을 멸하려고 꾀하고 쓴 조서를 취소하소서

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6절에 자신의 신세(身世 - 한 사람의 처지나 형편)을 한탄(恨歎 - 원망을 하거나 뉘우침이 있을 때에 한숨을 쉬며 탄식함)하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내 민족의 화 당함을 참아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참아 보리이까라고 합니다.

이러한 왕후 에스더의 하소연(억울하고 딱한 사정을 털어 놓고 멀허거나 간곡히 호소함)을 듣게 된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 87절에서 8절의 말씀처럼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와 유다인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하만이 유다인을 살해하려 하므로 나무에 달렸고

내가 그 집으로 에스더에게 주었더니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를 인을 칠찌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취소할 수 없음이니라.“ 말하며

모르드개와 에스더에게 조서를 자의(自意 - 자기의 생각이나 의견)적으로 쓸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附與 - 사람에게 권리, 명예, 임무 따위를 지니게 하거나

사물이나 일에 가치나 의의 따위를 붙여 줌)해 줍니다.

그리고 그 조서는 왕의 반지로 인친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취소 할 수 없음을 단호(斷乎 - 매우 엄격하다)하게 말합니다 이제 에스더 89절의 말씀처럼

시완월 곧 삼월 이십 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고

무릇 모르드개의 시키는 대로 조서를 써서

인도로부터 구스까지의 일백 이십 칠도 유다인과

대신과 방백과 관원에게 전할쌔

각 도의 문자와 각 민족의 방언과

유다인의 문자와 방언으로쓰게 되었고,

이어서 10절에 아하수에로 왕의 명의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치고

그 조서를 역졸들에게 부쳐 전하게 하니

저희는 왕궁에서 길러서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는 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역졸들은 준마(駿馬 - 썩 잘 달리는 말)를 타고

모르드개에 의해서 쓰여진 조서를 전국 각 도에 빠르게 전하였습니다. 이어서 에스더 811절에서 13절의 말씀에

조서에는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저희로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도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저희를 치려하는 자와 그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

아하수에로 왕의 각 도에서 아달월 곧 십이월 십 삼일 하루 동안에 하게 하였고 이 조서 초본을 각 도에 전하고 각 민족에게 반포하고 유다인으로 예비하였다가 그 날에 대적에게 원수를 갚게 한 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1213일은 에스더 313절의 말씀처럼 유다인들의 대학살이 결정(決定 - 행동이나 태도를 결단하여 정함,

또는 그 정해진 내용)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날이 바로 대역전(大逆轉 - 크게 형세가 뒤집혀 짐)이 되어 유다인들이 그 대적들을 진멸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도 같이 하만이 모르드개를 비롯하여 모든 유다인들을 죽이고자 꾀하여 오십 규빗의 나무를 세웠지만

자신이 세운 그 나무에 자신이 죽게 된 것처럼

1213일에 유다인을 대학살 하고자 음모(陰謀 - 좋지 못한 일을 몰래 꾸밈)를 꾸몄지만 오히려 그 날에 유다인들은 살아나게 되었고, 유다인들의 원수가 된 자신의 민족들이 학살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아하수에로 왕은 오히려 유다인들에게 원수를 갚게 하였습니다.

또한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의 이러한 명령을 급하게 내리게 되었습니다. 에스더 814절의 말씀에

왕의 명이 심히 급하매 역졸이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고 빨리 나가고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었습니다.

이제 모르드개는 에스더 815절의 말씀처럼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면류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의 앞에서 나오니 산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에 기록된 자색 가는 베 겉옷

에스더 16절 말씀에서도 자색 가는 베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입은 푸르고 흰색은 왕실에서 왕의 위엄을 높이기 위하여 사용했던 제왕색(帝王色)이었습니다.

또한 조복은 왕의 옷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에스더 816절의 말씀처럼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에스더 817절의 말씀처럼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많게 되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1213일 오게 되었고,

그 날은 원래 하만의 모략(謀略 - 남을 해치려고 속임수를 써서 일을 꾸밈)으로 유다인들이 진멸(盡滅 - 모두 멸망함)하는 날인데,

오히려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진멸하는 날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에스더 91절 말씀에 아달월 곧 십이월 십 삼일은 왕의 조명을 행하게 된 날이라 유다인의 대적이 저희를 제어하기를 바랐더니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제어하게되었습니다.

에스더 95절 말씀에

유다인이 칼로 그 모든 대적을 쳐서 도륙하고 진멸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마음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에스더 96절의 말씀처럼

유다인이 또 도성 수산에서 오백인을 죽이고 멸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포로로 끌려온 자들이 그 본토(本土 - 자기가 사는 그 고장)에 있는 자들을 죽이고 진멸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에스더 812절의 말씀처럼

아하수에로 왕의 각 도에서

아달월 곧 십이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하게허락한 것입니다.

이 때에 에스더 910절의 말씀처럼

함므다다의 손자요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열 아들도 죽임을 당하였고, 유다인들은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하만의 열 아들의 이름은

에스더 97절로 9절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 열 아들의 이름은

바산다다와 달본과 아스바다와 보라다와 아달리야와 아리다다와 바마스다와 아리새와 아리대와 왜사입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에게

에스더 913절 하반부에 기록된 말씀처럼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달게 하소서라고 간청하였고,

이에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 914절의 말씀처럼

왕이 그대로 행하기를 허락하고 조서를 수산에 내리니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가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바와도 같이

아하수에로 왕이 1213일 하루 동안에만 유다인들에게

원수들을 진멸하라고 허락하였는데

에스더 913절의 말씀에 에스더가 가로되 왕이 만일 선히 여기시거든 수산에 거하는 유다인으로 내일도

오늘날 조서대로 행하게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 914절의 말씀에

왕이 그대로 행하기를 허락하였습니다.

이에 유다인들이 에스더 915절의 말씀처럼

아달월 십 사일에도 수산에 있는 유다인이 모여 또 삼백인을 수산에서 도륙하되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처럼 앞서 살펴본 바와도 같이

유다인들은 하만의 열 아들은 죽이고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습니다.

또한 에스더 916절의 말씀에서도

왕의 각 도에 있는 다른 유다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자기를 미워하는 자 칠만 오천인을 도륙하되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역시나 전과 같이 원수들을 도륙하고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습니다.

도륙(屠戮)이란 사람이나 짐승을 무참하게

마구 죽이는 것을 의미하며, 다른 말로 도살(屠殺)이라고도 합니다.

에스더 920절에서 21절의 말씀처럼

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아하수에로 왕의 각 도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무론 원근하고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 사일과

십 오일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십 사일과 십 오일은 지키라는 의미는

유다인들이 원수들을 도륙하고 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더 917절의 말씀처럼

아달월 십 삼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십 사일에 쉬며

그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습니다.

또한 에스더 918절의 말씀처럼

수산에 거한 유다인은 십 삼일과 십 사일에 모였고

십 오일에 쉬며 이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에스더 917절 과 18절의 말씀을 합하여 살펴보면

유다인들이 원수를 진멸하고

그 다음날에 잔치를 벌여 기뻐하였는데

1213일에는 모든 유다인들이 원수를 진멸하였지만

1214일에는 수산에 있는 유다인들만 원수를 진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1214일은 수산에 거하는 유다인들을 제외하고

잔치를 벌인 것이고,

1215일에는 수산에 거하는 유다인들이 잔치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에스더 922절 말씀처럼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고 합니다.

에스더 926절 말씀에

무리가 부르의 이름을 좇아 이 두 날을 부림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에스더 928절 말씀에

각 도, 각 읍, 각 집에서 대대로 이 두 날을 기념하여 지키되

이 부림일을 유다인 중에서 폐하지 않게 하고

그 자손 중에서도 기념함이 폐하지 않게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부르제비를 뜻하는 페르시아어입니다.

에스더 37절 말씀 중에 부르 곧 제비를 뽑아라는 말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부르의 복수형은 부림인데,

에스더 921절의 말씀에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 사일과 십 오일을 지키라.“ 는 말씀처럼

이 날이 두 날이기 때문에

부르의 복수형인 부림을 사용하여

절기의 이름이 부림절로 지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날은 하만이 유다인들을 진멸하는 날을 정하기 위해서

제비를 뽑은 날입니다.

하지만 그 날에 오히려 하만 자신과 하만의 민족들이 유다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잠언 1633절에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은 이러한 승리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부림절이라는 명절을 제정(制定 - 제도나 법률 따위를

만들어 정함)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유대인들은 부림절을 지키고 있으며,

부림절에 회당(Synagog 유대인 회중들이 모여 안식일 예배를 드리는 곳, 재판, 율법 교육 등이 행해지는 곳)에 함께 모여서 에스더서를 낭독(朗讀 - 글을 소리내어 읽음)합니다.

그리고 에스더서를 읽는 중에 하만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참석자 모두가 그 이름을 크게 비웃고 조롱합니다.

이처럼 하만은 죽어서도 유대인들의 조롱(嘲弄 - 남을 비웃거나 얕보고 놀림)을 끊임없이 듣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에스더서를 읽는 중에 하만의 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이 영원히 소멸될지어다.” 라고 외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 세계에 분포(分布 - 여러 곳에 널리 퍼져 있음)되어져 있는 성도들은 주일 날 예배를 드리는 중에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암송(暗誦 - 시나 문장 따위를 보지 않고 소리 내어 외움)합니다.

이 사도신경의 내용 중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구절이 있는데

빌라도는 죽어서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끊임 없는 지탄(指彈 - 잘못을 지적하여 비난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림절 날 에스더서를 읽는 중에

97절에서 10절의 말씀은 중간에 끊지 않고 한숨에 읽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 말씀에 하만과 그의 열 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동시에 심판받아 죽음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차원(次元 - 사물을 바라보거나 생각하는 입장)에서

중간에 끊지 않고 한 번에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역사적인 영웅(英雄 -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

모르드개가 나오는 부분은 기뻐하며 크게 읽습니다.

또한 하만의 이름이 나올 때에는 그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지 않고

다른 여러 가지의 소음(騷音 - 불쾌하고 시끄러운 소리)을 만들어

하만의 이름이 들리지 않도록 합니다.

이는 하만을 비웃고 조롱하는 동시에 기억(記憶 - 지난 일을 잊지 아니함) 속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부림절날 자신들의 민족의 구원을 기뻐하며,

잔치를 벌여 음식을 먹는데,

이 부림절에 먹는 전통적인 음식으로는

하만의 귀혹은 하만의 주머니라고 불리우는

하만타쉔이 있습니다.

이 음식은 삼각형으로 생긴 빵입니다.

이 또한 하만을 조롱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신앙의 고백이 담긴

담대한 행위가 온 유다인들을

악한 하만의 계략에서 건져 낸 것입니다.

이 부림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유월절과 함께 또 다른 민족의 구원의 역사를 담고 있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 부림절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2의 출애굽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유월절과 부림절은 공통(共通 - 여럿 사이에 두루 통용되거나 관계가 있음)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解放 - 구속이나 억압, 속박을 풀어 자유롭게 함)된 날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바로 왕에게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 날이고,

부림절은 페르시아의 하만에게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 날입니다.

하지만 상이(相異 - 서로 다름)한 점은

유월절은 출애굽하여 지켜진 절기임에 반해

부림절은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 지켜진 절기입니다.

비록 유다인들이 이방국가인 페르시아 안에 머물렀지만

같은 민족인 모르드개는 총리가 되었고, 에스더는 왕후가 되었기에

유월절과 흡사(恰似 - 거의 똑같을 정도로 비슷하게)한 것입니다.

이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서 전반(全般 - 통틀어 모두)에 흐르는

하나님의 세밀(細密 - 자세하고 빈틈없이 꼼꼼하다)하신 역사하심이 풍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만에게 온 유다인들이 진멸당할 수 밖에 없는

그 날에 하만이 죽게 되었고,

오히려 유다인들이 그 날에 원수들을 진멸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전지전능(全知全能 - 무엇이나 다 알고 무엇이나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을 지라고

어느 성경 못지 않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에스더서는 여러 가지의 논란(論難 - 여럿이 서로 다른 주장을 벌이며 다툼)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정경(The Canon)에 포함되었습니다.

1차 독자(Reader)2차 독자(Read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1차 독자란 그 책이 기록될 당시와

아주 가까운 시대의 독자이고,

2차 독자란 1차 독자와는 달리 그 책이 기록될 당시와

아주 먼 시대의 독자입니다.

그래서 1차 독자는 그 책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2차 독자는 그 책이 내용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차 독자는 그 책이 기록될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그 책의 내용을 쉽게 이해하는 것이며,

2차 독자는 그 책이 기록될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책의 내용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2차 독자는 먼저 1차 독자와도 같은 마음과 이해력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한 2차 독자는 1차 독자의 눈으로 그 책을 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책에 기록된 내용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把握 - 어떤 대상의 내용이나 본질을 확실히 이해함)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에스더서도 그 시대적인 상황을 접하였거나 그 시대와 아주 가까운 시대의 사람들인 1차 독자들이라면

비록 에스더서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며,

그 시대적인 상황을 접하지 못했거나 그 시대와 아주 먼 시대의 사람들인 2차 독자들이라면

단순히 에스더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경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책이 기록될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마태복음1039절 말씀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삶이 우리 개개인을 위한 삶이 아닌

남을 위하며, 우리가 속한 교회를 위하며,

우리가 거주(居住 - 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머물러 삶)하고 있는

이 나라를 위한 삶으로 진보(進步 - 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짐)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아름답고도 숭고(崇高 - 존엄하고 거룩하다)한 삶이며, 그러한 삶을 통해서 온전하게 하나님께

영광(榮光 -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을 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73절 후반부에 기록된 말씀처럼

아하수에로 왕에게 간청하기를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르드개의 강한 요구에 의해서

아하수에로 왕의 부르심이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민족인 유다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에스더 416절 후반부의 말씀처럼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하면서 왕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처럼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인 요한 녹스도

당시에 스코틀랜드가 로마 가톨릭(Catholic Church)의 손아귀에

넘어가려는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옵소서

(Give me Scotland else I die)” 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이제 모르드개는 에스더 103절의 말씀처럼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서 존대하여 그 허다한 형제에게 굄을 받고 그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었다는 것은

모르드개가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굄을 받는 다는 말은 사랑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224절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순교의 믿음을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하시고,

그러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에스더의 아하수에로 왕 앞으로

나아가는 행함을 통해서 온 유다인들의 생명을 살리는

계기(契機 -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원인이나 기회)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이 있게 하셨고,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인해 죄인들에게 값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고,

영생(永生 -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게 하셨습니다.

이렇듯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共同體 - 생활이나 행동, 목적 따위를 같이 하는 두 사람 이상의 모임)를 등한시(等閑視 -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김)하고 자신만 살겠다고 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이기적인 주장(主張 -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굳게 내세움)은 하나님 앞에 결코 합당(合當 - 꼭 알맞다)한 것이 아니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하나님이 주신 겸손함과 사랑과 봉사와 섬김으로 아름답게 세워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擴張 - 범위, 규모, 세력 등을 늘려서 넓힘)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모습이며,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성취(成就 - 목적한 바를 이룸)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 혼자만 살겠다고 주장하며, 주위에 있는 자들을

돌아보지 못했던 삶을 하나님께 낱낱이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어

자신의 살과 피를 아낌없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 앞에

겸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겸손히 무릎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실천(實踐 - 실제로 행함)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붙들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세장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241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13절에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이 말씀처럼 지금의 이 시대(時代 - 역사적으로 어떤 표준에 따라 구분한 일정한 기간)는 사랑이 식어가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식어가는 나머지 사랑에 갈급(渴急 - 부족해서 몹시 바람)함을 느끼는 자들이 많아지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메말라가고, 고갈(枯渴 - 물이 말라 없어짐)되어 가는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한없는 사랑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마음 속에 믿음으로 충만하게 간직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을 통해서만이

이 말세지말(末世之末 - 예수 그리스도가 초림(탄생)한 때부터 재림할 때까지의 세상)에 끝까지 견딜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에스더에게 주어졌던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신앙(信仰 - 하나님을 믿고 받드는 일)

우리들에게도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충만(充滿 - 가득하게 차 있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담대한 신앙인이 다 되어서

죄악으로 썩어져만 가는 이 세상 속에서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고,

죄악으로 어두워져만 가는 이 세상 속에서 빛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소금과 빛된 신앙인들이 다 되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CORAM DEO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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