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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주차. <구원론 강설> 성화의 은혜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1. 3. 1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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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주차. <구원론 강설> 성화의 은혜 2020. 8. 16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딛 2:11~12)

 

성화란?

 

성화란 무엇입니까? 한자로 ‘거룩할 성’에 ‘될 화’인데 한 마디로 ‘거룩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레 11:45, 19:2, 벧전 1:15~16, 밷후 311 등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에게 있어서 ‘거룩하게 됨’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특히 레 11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합니다. 3절에 보니 먹을 만한 것들을 언급하는데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신 14:4~6에선 이에 해당하는 짐승들로 소, 양, 염소, 노루, 영양, 산 염소, 산양 등을 열거합니다. 그러나 새김질을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거나, 굽은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못하는 낙타나 사반(오소리?), 토끼, 돼지 등은 먹지도 말고 또 죽은 것은 만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9절에는 물에 있는 것 중에 지느러미가 있고 비늘이 있는 것만 먹으라 했고, 13~19절에는 새 중에서 독수리, 솔개, 부엉이, 따오지, 매, 까마귀, 올빼미, 갈매기, 황새, 박쥐 등을 먹지 말라 했으며, 21절에서는 땅의 곤충들 중 뛰는 다리가 있는 메뚜기, 베짱이, 귀뚜라미, 팟종이 종류는 먹을 수 있고 41절에는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은 가증하다고 하여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먹을 것을 가지고 거룩함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만족하셨습니다. 그리고 홍수 후에는 노아에게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된다고 공언하셨습니다. 다만 피 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레위기 11장에선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분하시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면 먹을 수 있는 것에는 독이 없고 먹지 말아야 하는 음식에는 독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거룩한 음식과 거룩하지 못한 음식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에 대해선 그 어떤 설명도 하시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거룩하신 명령에 순종할 따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먹으라고 한 것은 먹고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먹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레위기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약시대에도 얼마나 철저히 지켰는지 사도행전 10장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기도 가운데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ㅂ모자기 같은 것이 내려오는데 그 속에는 가증하고 부정하다고 말씀하신 ‘각종 네 발 달린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데 베드로더러 그것을 먹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이때 가장 어리둥절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레위기 말씀과 배치되는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고 살 때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표하고 경계를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출애굽한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엔 이미 그 땅에는 가나안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조리 우상숭배를 하는 족속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게 모르게 이들과 섞여 살면서 이들의 문화를 접촉하고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을 염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부터 보호하고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먹는 것에서부터 가나안 족속과 구별해 놓으심으로 그들과 구별된 삶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실상 인류는 먹거리가 무엇이냐에 따라 나라와 민족과 문화가 구별됩니다. 한국인은 김치와 된장국으로 민족적 특징을 가집니다. 이를 좀 더 좁혀보면 집안과 가정도 음식의 차이를 보입니다. 집집마다 음식문화가 다릅니다. 취향이 다르고 조리법이 다르고 양념이 다르고 내용도 다릅니다. 속된 말로 “먹자고 산다”고 하듯이 그만큼 음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인간의 삶에 거의 절대적입니다. 특히 음식 중에 ’술‘로 인해 타락하는 집들과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를 세우신 선교사님들이 한국의 성도들에게 술을 금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술을 먹으면서 거룩한 사람을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으로 소개한 레 11:45에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무엇으로 거룩하게 구별됩니까?

 

그럼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무엇으로 세상의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모든 율법 조항들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지 않고 우리도 그런 율법 조항에 얽매이지 않기에 레위기의 금지명령을 더 이상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막 7:18)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0:26에서 “어떤 음식이든 그 음식 자체가 부정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나아가 어떤 행동에 따라 우리가 거룩해지고 아니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레위기에 거론된 먹지 말아야 하는 동물 그 자체가 부정한 동물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기에 먹지 않아야 하듯이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모든 신자들이 알다시피 우리가 거룩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 외에는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잇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은 모두 성령의 세례를 통해 거듭나고 예수 피로 깨끗해진 새로운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나 선행이나 구제와 봉사가 인정되어 거룩해진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6:11에서 우리의 깨끗함과 거룩이, 우리의 새로운 신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기에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그런데 역사 안에서 우리의 새롭게 됨에 대해서 다른 주장을 하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여러차례 소개했지만 거룩하게 되는 ’성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하게 되었고, 또 거룩하게 되는 성황의 길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학적으로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fication)라 부릅니다. 이 용어는 ㅂ;ㅣ록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 거룩한 자, 의로운 자가 되었지만 우리 안에 모든 죄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므로 평생에 걸쳐 죄와 싸워 나감을 통해 점진적으로 거룩한 자가 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 ’점진적 성화‘의 개념에는 ‘거룩함을 위한 신자의 노력’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화를 위해 우리도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입니다. 그런데 유달리 이 성화를 위해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쪽으로 성화를 이끌고 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화의 교리에서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결국 인간중심 성화론 혹은 공로주의 혹은 인본주의 성화론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성화는 인간 스스로 단독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 전 존재를 얽매고 있는 뿌리깊은 죄성이 인간을 성화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신적 기원과 신적 원동력으로 시작되고 진행되어야 합니다. 즉 점진적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감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면 한순간도 거룩한 자리에 설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의 깊고도 진실한 고백을 들어봅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렇게 성화 교리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깊이 인식하고 믿음의 중심에 확고하게 자리잡도록 해야 합니다. 다만 여기서 또 유의해야 할 것은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면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사라지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성화 내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역할 및 책임을 균형있게 강조해야 합니다. 이 균형을 잡기 위해 우리가 개혁신학을 의지하고 연구하고 배우고 익히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이 아니고선 이 두 가지를 바르게 균형을 갖추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3. 어떻게 거룩하게 사는가?

 

그런데 문제는 거룩함을 받은 신자들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하고 살아야 하는가, 거룩하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기본적인 지침 중 대표적인 구절이 오늘 소개한 디도서 2장 11~12절의 말씀입니다. 다시 읽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딛 2:11~12)

 

물론 거룩하기 위해서 이 말씀만으로 해결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구절을 통해 우리가 거룩해지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디도서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경건하지 않은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 무엇이 경건한 삶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 자체가 경건의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경건한 사람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딤후 3:14~17) 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와 충심된 마음가짐으로 예배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늘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들이 있는데 ‘경건한’이라는 뜻의 ‘하시드’와 ‘예배’라는 뜻의 ‘유세베스’, 그리고 ‘열심있는’이라는 뜻의 ‘드레스케이아’가 그들입니다. 정리하면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 열심히 예배하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경건하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예배 하지 않는 사람이 거룩해지는 법이 없다는 경고를 들으시고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세상의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 세속주의 신앙은 심령밭을 헤치는 독극물입니다. 세속주의자는 단지 지금, 내게 주어진 일만을 위해, 그리고 오직 현세적 복을 받고 누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들에겐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일을 들추어내면 아예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고 들으려조차 하지 않습니다. 또 이들은 미래의 이일들을 준비하거나 대비하는 등의 일에 관심없습니다. 오직 오늘을 즐기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영국의 무신론자협회라는 단체에선 아예 대놓고 “하나님은 없다. 그러므로 오늘을 즐기라!!”고 가르칩니다.

~ 특히 세속주의는 육적인 일들에 함몰되어 영적인 일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영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없다보니 진리의 이야기를 들으면 싫증이 나고 자리를 피하거나 대적합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먹과 놀고 쾌락을 즐기는 일들입니다. 이들에게 거룩이라는 단어는 한심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이들에게 사랑과 희생 같은 거룩한 단어들은 실제 생활에는 엇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적당히 즐기는 것이 사랑이고 희생은 일방적인 손해이므로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들에게 오로지 육체적인 사랑과 자기 유익을 위한 이익추구만이 절대 선이자 목표입니다. 이런 정욕적인 일들에서 벗어나지않는 한 거룩은 없습니다.

 

셋째, 신중해야 합니다

~ ‘주마간산’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달리는 말 위에선 자세히 산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신중하지 못한 사람은 무엇이든지 눈 여겨 보거나 자세히 관찰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글을 읽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도 자세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합니다.

~ 철학에 있어서 신중함은 ‘파토스’에 해당하는데 이는 단순히 감정만의 정열이 아니라 매우 사려깊고 깊이 잇는 정열을 뜻합니다. 영어로는 carefulness로 번역합니다.

~ 그러나 성경에서 신중함은 좀 더 깊은 의미로 해석됩니다. 잠언에서 신중함은 주로 슬기로운 것(prudence)과 관련됩니다. 슬기는 지혜에 해당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말씀을 듣고 학식이 더해지고 오묘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고 합니다(잠 1:4~5). 이 지혜는 까불가불대고 가벼이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사가 아닙니다. 지헤는 신중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좀 여유롭게 차분하게 신중하게 신앙생활을 하시길 소망합니다.

 

넷째, 의로워야 합니다.

~ 의로운 삶에 대해 더 강조할 바가 없을만큼 의로움은 거룩의 핵심입니다. 의롭지 못한 자가 천국에 갈 수 없듯이 의롭지 않은 자를 가룩한 사람이라 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로움과 거룩함은 동의어이자 평생 동반자입니다.

 

4. 결어

 

진리를 수학하고 전도함에 있어서 두 가지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포괄적 조망 아래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포용적 조망 아래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포괄적이라 함은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 확고하고 분명한 태도를 보이되 진리를 다루는 방식과 방법에 있어서 전체적 안목과 관점을 기준으로 폭넓은 사고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전도방식이고, 포용적이라 함은 자기 진리 혹은 자기 주장이 다소 깍이는 부분을 감수하면서 아량을 베풀어 결국 타협하는 자세로서 이를 두고 에큐메니칼한 복음전도방식이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방식이 절묘하게 어울러지고 조화되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화의 주제를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주제를 하나님의 측면에서만 다루어서도 안되고 인간의 측면에서만 다루어서도 안됩니다. 만약 어느 한쪽 측면만 강조되면 어김없이 불균형적 신학 체계로 변질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성화, 즉 우리가 거룩하기 위해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딤전 4:5에서 우리가 거룩해지는 두 가지 방편으로 말씀과 기도를 예시합니다. 이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최선의 노력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철저히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고백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기도는 거룩의 3요소입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성화를 위해 성화의 씨앗을 심령 밭에 뿌립니다. 그리고 이 씨앗의 성장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은혜에 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를 햇빛과 비에 비유한다면 거름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고 곁가지를 제거하고 약을 뿌리는 일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입니다. 이제 성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기를 원합니다. 동시에 혹시 이 일을 함에 있어서 ‘나의 의’가 먼저 앞서지는 않는지 되돌아 보셔야 합니다. 교회봉사를 한답시고 다른 사람 앞에 자기 방식을 고집하고 지시하고 주장하지는 않습니까?

 

무엇보다 성화를 생각할 때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심령 밭에 뿌려진 씨앗들이 바로 이런 열매들로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아멘.


[출처] 33주차. <구원론 강설> 성화의 은혜 2020. 8. 16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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