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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 서 강해 (7)

김명도박사 강의

by 김경호 진실 2010. 7. 30. 12:55

본문

갈라디아 서 강해 (7)

                                                                                                               튶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오늘은 갈라디아서 강해 그 일곱 번째 시간으로 갈라디아서 제6장을 같이 공부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갈라디아 제5장을 통해서

1.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왜 유대교주의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따라 가는가? 라고 책망하면서 날, 월삭, 절기, 해를 지키는 일들이 잘 못이라는 점,

2. 유대교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열심을 내는 것을 보면 좋은 일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은 좋지만 저들 유대교주의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저들 유대교주의자들이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동기가 숨어 있으니 주의 하라는 점과

3. 유대교주의자들이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므로 그들의 가르침이 바르다고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두 부인이 있었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율법을 따라 종의 여인에게서 난 종 이스마엘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이삭이다.  하나님은 이삭과 언약을 맺었으며 이스마엘과 언약을 맺지 않았다. 이 두 여인과 두 아들은 두 언약으로 비유가 되는데 하갈과 이스마엘은 육적으로 난 옛 언약을 말하고, 사라와 이삭은 약속으로 난 그리스도 인들이며 이 땅의 예루살렘은 현재 유대교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사는 곳인 반면에, 새 예루살렘은 모든 믿는 사람의 어머니인데 이는 약속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하늘의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의 총체를 말한다는 것과

4. 옛날 이삭이 3살에 젖을 뗄 때 17살 먹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듯,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당시에도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유대교 주의자들이 약속의 자녀(갈라디아 지방의 성도들) 을 핍박했다.  21세기 오늘에 와서도 참 성도를 핍박하는 사람은 외부 불신자가 아니라 소위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이비 기독교 신자” 들이라는 는 것.  이삭을 핍박한 것은 불신자가 아니었다. 그의 이복 형 이스마엘이었다.  항상 참 성도를 악랄하게 핍박하는 자들은  믿는다고 하는 “사이비 신자” 들이라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마지막 장인 제6장을 공부하는데 갈라디아 6장은 18절 밖에 안 되는 비교적 짧은 장입니다만 상당히 깊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은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I.  6:1-10 서로 사랑하라
II. 6:11-18 심는 대로 거두리라

I.  6:1-10 서로 사랑하라
   갈라디아 5장 22절 이하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에  “사랑”이 맨 먼저 등장합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가르침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어주셨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 찾아오신 분은 사랑의 하나님이 십니다. 사도요한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고 요한일서 4:10에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 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5, 21, 23, 24 에도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킨다” 라고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5:3 이나 요이 6절이나 요일 3:23에도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 한다” 는 말은 어떤 선행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어느 공로를 세우는 것도 아니요 말로만 떠들어 대는 것도 아니고 주님에게 순종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대로 살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중생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연인 自然人, natural man,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 가 중생하게 되면 그 마음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심령이 새로워집니다. “주님을 사랑하며 따라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에 지배 되어 살아갑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이 아파서 몸부림칩니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거짓 신자” 들입니다. 우리 사회는 교회의 장로나 목사라는 사람들까지도 직분만 내세우며 성경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나라도 어지러워집니다.  유대나라에서는 제사장은 권력으로 다스리고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했고  백성들은 모두 “아멘” 하며 아무런 분변의식(分辨意識)도 없이 박수를 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벨론에게  잡혀가서 70년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백성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던 엘리의 두 아들 비느하스 와 홉니 그리고 그 아버지 엘리의 말로(末路)가 어떻게 되었는지 사무엘 상 4장을 읽어 보십시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 요리문답” 제56문에는 “하나님이 제3계명을 지키라 명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은 “하나님이 제3계명을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범죄하면 사람의 형벌은 피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 라고 아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자는 “위선자” 일 뿐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믿기만 하면 되고 성경대로 살 필요는 없다” 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 29:13) 라고 합니다.  거짓 선지자에게 속지 마십시오.
베뢰아 사람들 처럼 성경을 늘 상고하면서 설교가 성경에 부합되는지 늘 점검하십시오
(행 17:11). 너무도 “거짓 사역자들” 이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성경대로) 믿지 않고 성경대도 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또 교회 지도자들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가를 우리 주변에서 자세히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기독교 교계가 잘되어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을 도모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오늘 잘 못되어 가는 일들을 여기저기에 누누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이나 베드로후서 2장이나 디모데후서 3장과 4장, 데살로니가후서 2장 등을 읽으면 오늘 교회가 얼마나 진리에서 멀어져 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배도의 시대입니다. 무서운 배도가 기승을 부립니다.  서로 속고 속입니다.


6:1에서 바울은 범죄한 자에 대해서 어떻게 대할 것을 언급합니다. “법죄 한다” 는 말은 물건을 흠치거나 사람을 해치는 그러 범죄행위 보다는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실수하는 것” 을 말합니다. 여기서 “들어나거든” 이란 말은 원문에서 “paralambano” 인데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실수에 빠진다” 는 말입니다. 즉,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를 하게 될 경우를 말합니다. 이럴 경우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입니까? 바울의 가르침은  “온유한 심정으로” 그를 바로 잡아 그를 원 위치로 돌려놓도록, 다시는 실수 하지 않도록 바른 신앙으로 돌려놓으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로 잡는다‘는 헬라말은 ”katartizo" 로 마가 복음 4:21 에 나오는 바와 같이 “그믈을 고쳐서 원상대로 복구한다” 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물을 수리하여 원상 복구하여 쓰듯 실수 사는 사람을 고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길에 빠진 사람을 온유함으로 고쳐 주라는 말이 됩니다 . 실수는 누구나 하는 법입니다.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수하는 사람치고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바로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온유함으로, 또 오래 참으면서 그를 바로 잡으라” 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케 하느니라” (잠 15:1) 란 잠언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진리를 양보하거나 타협하는 것은 아닙니다. Latin 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Suaviter in modo et fortiter in re” (방법은 보다 부드럽게 그리고 실속은 보다 강하게, 外柔內剛) 이란 말이 있습니다.  남을 인자하게 대하면서도 진리문제는 양보나 타협이 없는 확고한  신앙태도를 말하는 Latin 말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도 그러하고 남을 바로 잡을 때도 그러하지만 결국 모두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므로 우리는 그 영혼을 붙들고 기도하고 그 영혼과 같이 기도하며 그를 바른 길로 되돌려 놓는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온유함으로 하라” 는 말은 중요합니다.  살후 3:15에서   “규모 없는 자를 원수와 같이 대하지 말고 형제같이 대하라“ 라고 말하는 바울의 말처럼 그런 정신으로 형제를 바로 잡아 주라는  말입니다. ”내가 만일 그런 사정에 있다면 남이 나에게 어떻게 대해 주기를 원할까?“ 라고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도 시험을 받을까 조심하라” 라는 말은 이런 사람들을 고치려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지거나 남보다 우월감에 빠지거나 자만심에 빠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자신을 돌보라는 말입니다. 흔히 우리는 다른 사람을 교정해 주면서 자신은 완전하고 흠이 없는 사람처럼 착각하여 교만에 빠질 때가 있는데 이는 위험한 일입니다.  율법은 사랑입니다. 첫째는 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형제를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구절에는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자기를 속임이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 부분에서는 “너희들은” 이란 말 즉 2인칭복수를 쓰면서 실수하는 사람을 바로잡아 주라고 하더니 그 다음에 “너 자신이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는 대목에서는 급작스럽게 2인칭 단수 대명사 (너) 를 쓰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바울은 우리 개인 개인에게 말합니다. 우리들 각자가 조심하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울은 자신이 몸소 그런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갈라디아 4:12 이하나 또 4:19-20을 읽어 보세요 바울이 어떤 온유한 심정으로 갈라디아사람들을 대했습니까?  갈라디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길에 빠져 들었습니다. 선생을 잘못 만난 탓이지요. 오늘도 목사를 잘못 만나면 여러 가지  그릇된 교리, 심지여 이단에 빠져 들게 됩니다. 속지 마십시오. 갈라디아 사람들은 교리적으로 중한 실수를 범했습니다. 진리의 복음을 따르지 않고 거짓 스승을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저들을 온순하게 대했습니다. 그 증거는 그가 즐겨 쓰는 “형제들아”라는 말에 잘 나타납니다.  얼마나 다정한 말입니까?

바울의 가르침은 2절에 “너희가 짐을 서로 나누어지라” 란 말에서 극치를 이룹니다.
“서로 집을 나누어지라” 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여기 2절에서 “짐”은 “우리가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 을 말하는 것이니 원문 헬라어에서는 “bare” 라는 단어 입니다.  이 말은 너무 무거워서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하는 짐을 말합니다. 물론 물질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정신적인 짐” 도 말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가벼운 짐“ 이 있고 ”무거운 짐“이 있는데 그 ”무거운 짐“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다음 5절에 나오는  “각자 자기의 짐을 질 것이요” 란 말의 "짐“과 혼동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5절에 나오는 ”짐“은 헬라어 원문에서 다른 말인  ”phortion“ 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fero"에서 나온 말로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의 뜻으로, 비교적 “가벼운 짐”을 말합니다. 가벼운 짐은 혼자 져야지요. 마태복음 16:24-25에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요“ 라고 하신 말은 자기가 질 수 있는 만큼의 짐을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자기 혼자서는 도저히 질 수 없는 짐을 형제가 서로 나누어지라는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Bastazete“ 란 헬라어는  ”Bastazo“ 의 현재형 동사이니 이 나그네 인생길을 다 가도록 늘 ”계속해서” 서로 서로의 짐을 나눠지며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로마인서 12:15절의 “즐거워하는 자와 더불어 줄거워 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라는 말과 곁들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갈라디아 6장에서는 영적으로 침체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라는 말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이룬다는 말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이란 말입니다.  기독교에는 <독불장군> (獨不將軍) 이 없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들입니다. 모두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되어 있으며 (요 15:1) 동시에 성도들 간에도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진리를 에베소서 2장20절 이하에는 건물마다 연합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간다” 라고 엡 2:21에 나타내 줍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자는 스스로를 속이는 자”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자격이 있는 사람이 스스로 겸양하여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의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아무 것도 되지 못했으면서 스스로 교만하여 무엇이 된 줄로 생각하고  남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자들“ 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울 시대보다 오늘 우리들 주변에 더  많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처럼,“ 혹은 ”남을 지배할 위치에 있는 것“ 처럼 거짓으로 행세하는 무리들을 바울이 꾸짖는 것입니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 납니다 (잠 13:10). 교만에서는 유익이 전혀 없습니다.  말하자면 갈라디아 지방의 거짓 선생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자격이 충분하면서도 겸양하는 바울의 태도와 아무것도 되지못하고도 된 줄로 여기고 사람들을 어지럽히는 사람들과는 좋은 대조를 보입니다.

바울은 남다른 수고를 많이 하고, 이방인의 선교사로 평생을 고생하며 사역했지만 (고후 11:22절 이하 참조), 그는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 라고 자신을 겸양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8).  바울사도를 한편에 놓고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사람이 스스로를 선생인줄 알고 교만히 행하는 사람을 다른 한편에 놀고 보면 양자 사이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영어로 <know-it-all> 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일만 인(一萬人)의 스승이라고 하고 (고전 4:15),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했고 (고전 4:1), 사도로서 남보다 더 수고를 더 많이 했다 (고전 15:10) 고 하지만 그의 공로를 한 번도 자랑한 적이 없습니다 (롬7;24).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이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자‘ 라고 본인은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착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자“ 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지나친 자신감을 가지는 것을 책망합니다.  ”겸손은 존귀의 앞장이지만 교만은 패방의 선봉“일 뿐이라고 잠언 기자는 말 합니다 (잠 16:18).  ”자녀들아, 나는 많은 사람이 선생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라고 한 야고보 3:1 말씀도 기억해 두십시오.  선생 된 자는 더 큰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잘못 인도하여 실족케 하면 큰 연자돌을 목에 달리운채 깊은 물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마 18:6).

6절에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란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서 말씀이란 말은 원문에서는 ”katachumenos" 이니 “요리문답”을 말합니다. “교리공부”를 말합니다. “교리공부” 를 가르치는 분과 깊은 영적 교제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오늘 교리공부를 가르치는 교회는 흔하지 않지만 바울 당시에 이미 교리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줍니다.  교리공부를 가르침 받는 자는 교리공부를 가르쳐주는 진실된 교사들과 좋은 믿음의 교제 (koinonia)를 같이 하라는 말입니다. “좋은 것”이란 원문의 “agathoi" 라는 복수 명사이니 물질만 아니라 모든 유익한 선행들을 포함합니다.

헬라어에는 ”좋다“ 는 말이 둘 이 있는데 ”kalos“ 와 ”agathos“ 입니다. ”kalos" 는 도덕  윤리면에서 좋다는 말이요 "agatho" 는 본질이 좋다는 말입니다 (8절과 비교).

7절에, 하나님은 만휼히 여김을 받지 않으니 심는 대로 거두리라“ 란 말은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목사이고 정치인이고 선생이고 속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모두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속이는 자들은 반드시 마지막 날 주 앞에 설 때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악을 심으면 악으로 인하여 형벌을 거두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이상을 말합니다. 8절을 보면,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서 심는 자는 성령으로 인하여 영생을 거두리라“ 라고 말합니다. 영생과 영멸(永滅) 을 대조해서 말합니다.  육체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그의 결국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의 구원을 얻은 자입니다. 사람이 ”심는 대로 거둔다“ 는 진리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말은 내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생의 구원은 항상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의 공로는 조금도 가산되지 않습니다 (엡 2:8).

“육으로 심는다” 는 말은 “옛 사람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생활습관” 을 말합니다. 한편 “성령으로 심는다” 는 말을 “성령의 지배로 살아가는 생활습관” 을 말합니다. 이 둘을 서로 상반됩니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도 이 양자 간의 싸움은 죽을 때까지 늘 계속됩니다. 즉 성화가 계속한다는 말입니다  성화는 죽을 때 끝이 납니다.  바울의 성화의 과정을 롬 7장
이나 빌립보 3장에서  읽어 보십시오.

9절에서,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라”고 가르치는데, 선은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인 윤리적인 선을 추구하는 일이니 남을 구제하는 일이나 남을 도와주는 일들 모두가 이에 포함됩니다.  사람들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때가 되매 거두리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시는 가우데 되어지는 일이기에 하나님이 그의 때에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낙심은 언제나 절대  금물입니다.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낙심입니다.  우리가 낙심하는 것은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심리에서 오는 것이니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훼방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가 어느 날 수요예배에 출석 교인들이 안 보이자 울상을 하고 낙심했다고 합니다. 그때 부인이 검은 상복을 입고 루터 앞에 나타나자 이를 본 루터가 “누가 죽었는가” 라고 반사적으로 물었습니다.  그때 그 부인의 대답이 “네, 오늘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라고 하니 루터가 “하나님이 어찌 죽는가?” 라고 말하자 부인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당신이 왜 낙심하십니까?” 라는 말을 했고, 루터는 그 말을 듣고 새로운 용기를 얻어 그 날 밤 힘 있게 설교를 했다는 실화가 있습니다. 어려움 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꼭 들려 주고 싶습니다. 때가 되면 거두어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때가 이르매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되어 지는 모든 것은 주님이 주장하시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전제주권(專制主權)에 따라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것은 나의 생활의 철학입니다.  우리는 남모르게 선을 행하다가 지칠 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3:1에는 “위의 것을 바라보라” 고 권면합니다. 그곳엔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의 영 즉 성령은 우리 마음에 게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여기 6:9에서 기회란 “kairos" 이니 우리 말 성겨에 바로 번역했습니다. 헬라어에는
“때” 라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chronos"는 시간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어의 chronology 라는 단어나 synchronize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kairos" 란 말은 시간 개념이 아니고 <기회 개념에서의 때> 를 말합니다.  가령 딤후 4장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는 원어에서 “kairos" 를 사용하여 ”eukaipos kai akairos"입니다. <기회가 좋건 기회가 나쁘건 간에> 이란 말입니다.  복음전파는 기회가 좋을 때만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좋지 못한 상황, 이를테면 공산치하에서도, 이슬람 권에서도, 복음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우리 모두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선행을 해야 하지만 특히 “믿는 가정들에게” 더욱 그리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일반은총”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특별은총” 으로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II. 6:11-18 심는 대로 거두리라
  이제 6장 후반부인 11절에서 18절까지를 공부합시다.  여기 주제는 “심는대로 거두리라”
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시력이 나빠졌습니다. 그가 고후 12:8에서 “육신의 가시” 라고 말한 것은 “눈의 시력”을 말하는 것이라고 믿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유대인들의 핍박‘ 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대개 전자의 경우처럼 그의 나빠진 시력회복을 위하여 그가 세 번 기도했고 그 때마다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고 응답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기록할 때 대서사 (代書士, amanuensis)를 고용했습니다 (롬 16:22 참고).  여기 갈라디아 6:11에서 “내 손으로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란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우선  바울이 편지를 쓸 때 다른 대서사를 고용해서 기록했지만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는 하도 사태가 심각하여 직접 바울이 자기 손으로 썼다는 해석과, 또 다른 해석은 이 편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 대목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바울의 의지를 나타낸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12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유대교주의자들은 다른 사람의 유익은 안중에도 없고,오로지 자기들의 명예와 자기들의 체면만 생각하여 할례를 강요한다고 말합니다.  할례 받는 일을 십자가 사건보다 더 중요시하여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면하려고 하는 생각뿐인 것을 바울은 못 마땅히 생각하여 “육체의 모양을 내는 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이 오기 때문에 유대교주의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13절에서도 같은 말을 계속합니다. 할례가 무슨 소용인가 하는 것이지요.  할례가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시행했던
의식입니다 (창 17장). 그것이 영원한 신앙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할례는 신약에서는 세례가 되는 것인데 세례는 <속사람이 거듭난 것을 밖으로 인치는 의식> 입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이 중생하지 못하고 셰례를 받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세례가 구원의 조건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강도는 세례 없이도 구원을 얻었습니다 (눅 23:43). “수세중생설” (受洗重生說 baptismal regeneration) 이란 교리가 있습니다. 세례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 셰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학설입니다. 1863년 6월 영국의
Metropolitan Tabernacle에서 설교하는 침례교 Spurgeon 목사는 이를 목숨을 내걸고 반대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침례교 목사였지만 철저한 칼빈주의적 개혁주의를 신봉했습니다. 그의 <All Round Ministry> 나 <To My Students> 라는 책들은 신학생의 필독서로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14절에, “내게는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누리게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 하니라” 란 말을 생각합시다.  왜 바울을 십자가만 자랑하는가요?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돌입니다 (고전 1:23).  십자가는 인간의 영적파산을 노골적으로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는데 교만한 유대인들은 이를 싫어합니다. 저들은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선민” 이므로 이방인보다 의로운 사람들인데 십자가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의 죄인이며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저들은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18). 영국의 찬소가의 왕이라는
Isaac Watts 는 정원무덤과 겟세마네 동산을 다녀와서 유명한 찬송시 147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란 찬송시를 썼습니다. 원문은 “When I Survey the Wondrous Cross"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십자가을 어떻게 자랑합니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째, 주님에게 빈손 들고 나와 그에게 전폭적으로 순종하므로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갈라디아 2:20을 외우십시오

둘 째,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할하신 주님의 능력이 늘 충만하여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빌립보 3:7-16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셋 째,  십자가의 주님을 전하도록 성령의 강권받음으로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16 에는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라” 라고 했고  고후 5:14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한다‘ 고 했습니다.

넷 째,  십자가의 주님을 이단으로부터 지켜 보호해 나가므로 자랑했습니다. 엡 6:10이g에서 바울은 우리들에게 전신 갑주를 입고 악한 자의 화전을 막으라고 합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도 같은 신앙고백을 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세상에 대하여 못박혔는가?  
빌립보 3:7절 이하에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 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윱럽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던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러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빌 3:7-12) 란 말씀에 잘 나타납니다.

15절에 할례나 무할례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울은 로마인서 2장을 쓰면서 "데저 표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롬 2:28-29).   유대교주의자들은 할례를 중요시하여 다른 이방인으로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또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님을 분명히 바울이 가르쳐 줍니다.

17절에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다” 란 말은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을 여행하는 도중에 그를 핍박하는 자들로부터 받은 몸의 상처를 일컫는 말이지만 그 상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다가 받은 상처이기에 능히 “예수의 흔적”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이제부터는 이런 무모한 잘 못된 교리에 속아서 바울을 괴롭히는 일을 하지 말고 영적으로 성숙하여 분별력을 가지고 성령으로 심어 영생을 얻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십자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하면서 갈라디아서를 마친다.

오늘 배운 내용을 정리하면
1. 남이 실수하면 그를 바로 잡는데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온유하게 대할 것
2. 남이 혼자서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은 서로 짐을 나누어져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몸소 실행할 것
3. 되지못하고 된 줄로 착각한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자이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할 것
4.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복하며 신령한 생활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것
5.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 것은 기회가 오면 그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
6.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 이다. 바울은 이 십자가를 전하기 위해서 세상에 못박히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했다. 이런 내용들을 공부했습니다.

                                                           -갈라디아서 강해 (7), 끝-
http://tulipministries.com/bbs/view.php?id=theology&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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